[문서]웨슬리를 오해한 사람들에대한 웨슬리의 주장9 (1739.7.7, 1739.7.31)
본문
[1739년 7월 7일(토)] - 휫필드와의 대화 -
나는 그와 이야기 할 기회를 가졌는데,
하나님의 내적인 역사와 더불어
종종 수반되는 그러한 외적인 표징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의 반론들이 대부분 사실과는
사뭇 다른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의 적용 부분에서)
그가 모든 죄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를 믿을 것에 대해서 초청하자마자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와 가까운 곳에서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의식이나 미동이 없이 누워 있었고,
두 번째 사람은 심하게 떨고 있었고,
세 번째 사람은 그의 온 몸에 강한 경련을 일으켰지만
신음하는 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를 내지 않았다.
네 번째 사람도 동일하게 경련을 일으켰고
눈물을 많이 흘렸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불렀다.
이 때부터 내가 믿게 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1739년 7월 31일(화)]
브래드포드 (Bradford)에서
이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신분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전한 말씀은
‘구원받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그들은 모두 예의를 갖춰서 행동했고,
끝나기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반면에, 돌아오는 길에 배쓰 (Bath)에 들러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 회중들은
브래드포드의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내가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라는
말씀을 적용할 때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 이 시간
내 손에 들려 있는 책, 종교적 기만에 대한 주의를
쓴 저자에게 글을 써 보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목사님께,
① (내가 감리교인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당신은 내가 ‘공허하게 자기 자신만 확신하고,
자랑하고, 경솔하고, 가차없이 비난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합니다;
‘소위 영혼을 압도하면서
하나님의 손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알아볼 수도 있도록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
즉, 감사함으로 받도록 되어 진 것들,
절제와 기도, 그리고 다른 종교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의무를 무시하게 했다’고 합니다.
오, 목사님!
나에게 이렇게 공격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 날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② 그렇습니다.
나는 산과 길에 가서 불쌍한 죄인들을 불러
그리스도께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소란스럽게’ 하지도 않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깨뜨리지도’ 않았고,
‘각 가정에 해를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법도 어기지 않았고,
더군다나 ‘규칙과 권위를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일하는 곳에 가서
방해한 게 아니라,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될 그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수고를 한 것입니다.
③ 사람들은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이교도들도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내적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의로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원래 우리 자신을 구할 힘도,
우리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질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자연 상태에 있어서는
단지 계속해서 악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대하고도 강력한 변화를 뜻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암시하는 것은 도둑질, 거짓말 하는 것,
온전치 못하게 행하는
모든 의사소통과 같은 것에서의 변화인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속의 영이 내적으로 새로워지는
철저한 마음의 변화를 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교만과 수천 가지의 가식적인 욕망들에 의해서
더러워진 겉으로 보기에
‘악한 대화,’ ‘믿지 않는 악한 마음’보다
훨씬 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 사람’이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선한 대화,’ ‘선한 마음’보다 훨씬 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서 의롭게,
그리고 참으로 거룩하게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충만한 마음 상태이고,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데,
온전한 거룩함으로 대화를 하게 합니다.
④ 전자의 이러한 상태에서 후자로 바뀌는 변화를 일컬어
나는 ‘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기를
내가 ‘분명하고도 평이한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근거 없는 자만심으로 채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공공연하게 저지른 당신의 무례한 거짓에 대해서
하나님께나 저에게나 세상에게
어떻게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⑤ 당신은 아마도
‘화이트필드 씨 (Mr. Whitefield)의 말을 인용해서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나에게는 그가 사용한 말들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그 저널은 인쇄 되기 전까지
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나만큼이나
화이트필드 씨에 대해서 잘못 취급하고 있습니다.
❶ 당신이 퀘이커 교도들의 개념들을
대체로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에 관해서)
옳은 것으로 좋은 것으로 판단할 때에
화이트필드 씨의 말을 사용하는데;
그는 단지 당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❷ 당신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지식’이 없이도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화이트필드 씨가 ‘가정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그런 가정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화이트필드 씨가 ‘가정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믿는다’는 말을 사용할 때 의미했던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조의 항목들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진실로 믿고 확신하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⑥ 이제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나는 순결하고, 술에 취하지 않았고,
바르게 나의 일을 행하고, 이웃을 도와 주고,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해도,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더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그렇게 훌륭하게 처신을 할 지라도,
하나님의 약속들이 사실이라면,
‘그가 이전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어떤 일을 그 자신 안에서 경험하게 될 때까지
그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은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가 지은 죄들이 사함을 받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많은 다른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까지는
그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의 마음에 넘쳐 흐르게 되는데,
모든 이해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기쁨이고,
충만한 영광입니다.
즉, 그 기쁨은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⑦ 그것들은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
내적인 것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 열매들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매들이 없다면,
나는 성경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목사님, 내가 당신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바라는 바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아직
‘그것을 내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면,’
만약에 당신이
‘그리스도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들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최소한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에 강력하게 불을 붙여주실 때,
당신은 그러한 일들이
매우 합당하게 일어나는 일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바람 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당신의 몸의 일부분에 부딪침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외적인 효과와
좀 더 거리가 있는 효과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영이 그것을 느끼게 됨으로써 알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평강과 기쁨,
그리고 사랑을 당신이 느끼게 됨으로써 알게 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종종 침착하고 편협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저자에 의해서 다루어진 내용에 대해서
숙고해 볼 것을 기대한다.
그 내용은 이 시대에 출판되어
열광주의나 종교적 망상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담론 안에 들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목사들 중에는
그가 담당하는 교구의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을
자신의 일로 간주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 중에도
그의 독자들에게 어떤 설교자들이나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경계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설교자들은
열정적인 설교자를 말하는 것이고,
감리회 설교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사들과 글 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일을 행하는지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제, 사랑, 진리가 아니고서는
어떤 일도 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아마도 다음의 규정들을 그들이 준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① 현재 행해지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성경에는 옛 성인들이 비난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살았던 시기에
그들도 역시 사람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② 성서를 가르치는 것과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직에 임명된 사람들을 질책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지키려고 애쓰는 것을
잘 알지 못하면서 질책할 수도 있습니다.
③ 교회의 성도들을 질책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선한 삶을 살고 있고,
개인의 집에서 사적인 종교적 모임들을 가지기도 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공적인 사회 활동에도 참여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 그랬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교구에는
경건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시간 삽십 분 이상
교회의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④ 교회의 성만찬과 예배에
꾸준히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적으로 모일 때
때로 다른 기도문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교회의 가장 훌륭한 목사님들도
기도문을 많이 작성하기도 하고 출판해 왔지만,
공적인 권위에 승인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교회가
사적으로 모이는 모든 모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 인정하는 것입니다.
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거룩한 일을 가늠하는
대단한 기준으로 삼지 마십시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은
교리와 성서에서 배우게 되는 진리가
일치할 때에만 틀림 없다는 것입니다.
⑥ 교회에서 함부로 사람을 내쫓지 마십시오.
교회의 성만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그들을 무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그런 사람들로 취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⑦ 어리석은 이야기를 경솔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로 소문이 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부정적인 규정들을 열거하는 것은
그 규정들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곧바로 상처를 입게 될 수 있는 교회와
교회에서 인정하는 변호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비판에 자신을 개방시킨다는 것에 있고,
그 비판들과 상반되게 행동을 한다면
교회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와 이야기 할 기회를 가졌는데,
하나님의 내적인 역사와 더불어
종종 수반되는 그러한 외적인 표징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의 반론들이 대부분 사실과는
사뭇 다른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의 적용 부분에서)
그가 모든 죄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를 믿을 것에 대해서 초청하자마자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와 가까운 곳에서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의식이나 미동이 없이 누워 있었고,
두 번째 사람은 심하게 떨고 있었고,
세 번째 사람은 그의 온 몸에 강한 경련을 일으켰지만
신음하는 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를 내지 않았다.
네 번째 사람도 동일하게 경련을 일으켰고
눈물을 많이 흘렸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불렀다.
이 때부터 내가 믿게 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1739년 7월 31일(화)]
브래드포드 (Bradford)에서
이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신분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전한 말씀은
‘구원받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그들은 모두 예의를 갖춰서 행동했고,
끝나기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반면에, 돌아오는 길에 배쓰 (Bath)에 들러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 회중들은
브래드포드의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내가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라는
말씀을 적용할 때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 이 시간
내 손에 들려 있는 책, 종교적 기만에 대한 주의를
쓴 저자에게 글을 써 보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목사님께,
① (내가 감리교인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당신은 내가 ‘공허하게 자기 자신만 확신하고,
자랑하고, 경솔하고, 가차없이 비난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합니다;
‘소위 영혼을 압도하면서
하나님의 손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알아볼 수도 있도록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
즉, 감사함으로 받도록 되어 진 것들,
절제와 기도, 그리고 다른 종교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의무를 무시하게 했다’고 합니다.
오, 목사님!
나에게 이렇게 공격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 날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② 그렇습니다.
나는 산과 길에 가서 불쌍한 죄인들을 불러
그리스도께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소란스럽게’ 하지도 않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깨뜨리지도’ 않았고,
‘각 가정에 해를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법도 어기지 않았고,
더군다나 ‘규칙과 권위를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일하는 곳에 가서
방해한 게 아니라,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될 그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수고를 한 것입니다.
③ 사람들은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이교도들도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내적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의로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원래 우리 자신을 구할 힘도,
우리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질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자연 상태에 있어서는
단지 계속해서 악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대하고도 강력한 변화를 뜻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암시하는 것은 도둑질, 거짓말 하는 것,
온전치 못하게 행하는
모든 의사소통과 같은 것에서의 변화인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속의 영이 내적으로 새로워지는
철저한 마음의 변화를 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교만과 수천 가지의 가식적인 욕망들에 의해서
더러워진 겉으로 보기에
‘악한 대화,’ ‘믿지 않는 악한 마음’보다
훨씬 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 사람’이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선한 대화,’ ‘선한 마음’보다 훨씬 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서 의롭게,
그리고 참으로 거룩하게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충만한 마음 상태이고,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데,
온전한 거룩함으로 대화를 하게 합니다.
④ 전자의 이러한 상태에서 후자로 바뀌는 변화를 일컬어
나는 ‘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기를
내가 ‘분명하고도 평이한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근거 없는 자만심으로 채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공공연하게 저지른 당신의 무례한 거짓에 대해서
하나님께나 저에게나 세상에게
어떻게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⑤ 당신은 아마도
‘화이트필드 씨 (Mr. Whitefield)의 말을 인용해서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나에게는 그가 사용한 말들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그 저널은 인쇄 되기 전까지
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나만큼이나
화이트필드 씨에 대해서 잘못 취급하고 있습니다.
❶ 당신이 퀘이커 교도들의 개념들을
대체로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에 관해서)
옳은 것으로 좋은 것으로 판단할 때에
화이트필드 씨의 말을 사용하는데;
그는 단지 당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❷ 당신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지식’이 없이도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화이트필드 씨가 ‘가정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그런 가정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화이트필드 씨가 ‘가정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믿는다’는 말을 사용할 때 의미했던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조의 항목들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진실로 믿고 확신하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⑥ 이제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나는 순결하고, 술에 취하지 않았고,
바르게 나의 일을 행하고, 이웃을 도와 주고,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해도,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더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그렇게 훌륭하게 처신을 할 지라도,
하나님의 약속들이 사실이라면,
‘그가 이전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어떤 일을 그 자신 안에서 경험하게 될 때까지
그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은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가 지은 죄들이 사함을 받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많은 다른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까지는
그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의 마음에 넘쳐 흐르게 되는데,
모든 이해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기쁨이고,
충만한 영광입니다.
즉, 그 기쁨은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⑦ 그것들은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
내적인 것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 열매들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매들이 없다면,
나는 성경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목사님, 내가 당신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바라는 바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아직
‘그것을 내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면,’
만약에 당신이
‘그리스도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들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최소한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에 강력하게 불을 붙여주실 때,
당신은 그러한 일들이
매우 합당하게 일어나는 일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바람 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당신의 몸의 일부분에 부딪침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외적인 효과와
좀 더 거리가 있는 효과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영이 그것을 느끼게 됨으로써 알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평강과 기쁨,
그리고 사랑을 당신이 느끼게 됨으로써 알게 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종종 침착하고 편협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저자에 의해서 다루어진 내용에 대해서
숙고해 볼 것을 기대한다.
그 내용은 이 시대에 출판되어
열광주의나 종교적 망상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담론 안에 들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목사들 중에는
그가 담당하는 교구의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을
자신의 일로 간주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 중에도
그의 독자들에게 어떤 설교자들이나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경계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설교자들은
열정적인 설교자를 말하는 것이고,
감리회 설교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사들과 글 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일을 행하는지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제, 사랑, 진리가 아니고서는
어떤 일도 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아마도 다음의 규정들을 그들이 준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① 현재 행해지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성경에는 옛 성인들이 비난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살았던 시기에
그들도 역시 사람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② 성서를 가르치는 것과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직에 임명된 사람들을 질책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지키려고 애쓰는 것을
잘 알지 못하면서 질책할 수도 있습니다.
③ 교회의 성도들을 질책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선한 삶을 살고 있고,
개인의 집에서 사적인 종교적 모임들을 가지기도 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공적인 사회 활동에도 참여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 그랬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교구에는
경건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시간 삽십 분 이상
교회의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④ 교회의 성만찬과 예배에
꾸준히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적으로 모일 때
때로 다른 기도문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교회의 가장 훌륭한 목사님들도
기도문을 많이 작성하기도 하고 출판해 왔지만,
공적인 권위에 승인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교회가
사적으로 모이는 모든 모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 인정하는 것입니다.
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거룩한 일을 가늠하는
대단한 기준으로 삼지 마십시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은
교리와 성서에서 배우게 되는 진리가
일치할 때에만 틀림 없다는 것입니다.
⑥ 교회에서 함부로 사람을 내쫓지 마십시오.
교회의 성만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그들을 무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그런 사람들로 취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⑦ 어리석은 이야기를 경솔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로 소문이 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부정적인 규정들을 열거하는 것은
그 규정들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곧바로 상처를 입게 될 수 있는 교회와
교회에서 인정하는 변호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비판에 자신을 개방시킨다는 것에 있고,
그 비판들과 상반되게 행동을 한다면
교회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