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웨슬리를 오해한 사람들에대한 웨슬리의 주장13 (1739.11.24)
본문
[1739년 11월 24일(토)]
괴로워하는 나의 누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온 한 사람이 우리에게
엑시터 (Exeter)에 와 달라는 초청을 했고, 우리는 그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25일 주일에 던스콤베 씨 (Mr. Dunscombe)는
아침과 오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된 설교 강단에서
설교가 행해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나는 세이트 매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다’
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했다.
워커 박사 (Dr. Walker)는 설교 후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오후에 설교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잘못된 교리를 설교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국 교회의 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는 신중할 필요가 있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열광주의나 좌절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반대 (매우 자주 부딪치는데)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숙고해 보니, 그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사안의 진정한 상태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진다
① 해롭지 않은 것
②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
③ (소위) 선을 행하는 것
즉 우리 이웃들을 돕는 일로서 주로 구호품을 주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적인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그가 하는 일에 있어서
늘 정직하고, 의롭고, 공평한 사람이다.
교회에 꾸준히 다니고 성만찬에 늘 참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많은 구호 물자를 제공하고,
(흔히 말하기를) 선을 많이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한 것, 즉 ‘하나님의 나라’
(또는 참 종교, 하나님께서 영혼들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결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를 해석함에 있어서,
나는 종교가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으로 또는 이 세 가지 모두로
적절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해하지 않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선을 많이 행할 수 있어도,
참 종교를 전혀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확신하는 것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전에 진리에 대해서 무지했던 누군가에게
이 위대한 진리를 감명을 주어 깨닫게 하신다면,
그 감명은 그의 영혼에 부담감을 주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그것을 절망이라고 항상 칭하곤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또는 참 종교)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이다’라는 말씀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이해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중에 즐거워하는 것’은
곧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영광으로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삶을 살고 종교적인 사람이 됨에 따라,
그것 없이는 모두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서
그에게 주사 그의 마음에 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적인 형식을 지녔지만, 능력은 없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주의이다.
사실 나는 이 본문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해석 방법대로라면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플레이토 (Plato)나 히에로클레스 (Hierocles)의 글들보다
내적인 종교에 대해서 훨씬 적게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지키는 사람들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을 금하셨다)
사람들을 이 절망 속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위험이나 이 열광주의로 그들을 인도하는
모든 위험을 의심할 바 없이 피하게 될 것이다.
괴로워하는 나의 누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온 한 사람이 우리에게
엑시터 (Exeter)에 와 달라는 초청을 했고, 우리는 그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25일 주일에 던스콤베 씨 (Mr. Dunscombe)는
아침과 오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된 설교 강단에서
설교가 행해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나는 세이트 매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다’
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했다.
워커 박사 (Dr. Walker)는 설교 후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오후에 설교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잘못된 교리를 설교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국 교회의 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는 신중할 필요가 있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열광주의나 좌절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반대 (매우 자주 부딪치는데)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숙고해 보니, 그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사안의 진정한 상태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진다
① 해롭지 않은 것
②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
③ (소위) 선을 행하는 것
즉 우리 이웃들을 돕는 일로서 주로 구호품을 주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적인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그가 하는 일에 있어서
늘 정직하고, 의롭고, 공평한 사람이다.
교회에 꾸준히 다니고 성만찬에 늘 참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많은 구호 물자를 제공하고,
(흔히 말하기를) 선을 많이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한 것, 즉 ‘하나님의 나라’
(또는 참 종교, 하나님께서 영혼들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결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를 해석함에 있어서,
나는 종교가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으로 또는 이 세 가지 모두로
적절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해하지 않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선을 많이 행할 수 있어도,
참 종교를 전혀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확신하는 것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전에 진리에 대해서 무지했던 누군가에게
이 위대한 진리를 감명을 주어 깨닫게 하신다면,
그 감명은 그의 영혼에 부담감을 주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그것을 절망이라고 항상 칭하곤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또는 참 종교)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이다’라는 말씀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이해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중에 즐거워하는 것’은
곧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영광으로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삶을 살고 종교적인 사람이 됨에 따라,
그것 없이는 모두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서
그에게 주사 그의 마음에 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적인 형식을 지녔지만, 능력은 없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주의이다.
사실 나는 이 본문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해석 방법대로라면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플레이토 (Plato)나 히에로클레스 (Hierocles)의 글들보다
내적인 종교에 대해서 훨씬 적게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지키는 사람들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을 금하셨다)
사람들을 이 절망 속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위험이나 이 열광주의로 그들을 인도하는
모든 위험을 의심할 바 없이 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