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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존 웨슬리의 페터레인 성령체험 -김홍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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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페터레인 성령체험



김홍기 :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




들어가는 말: 21세기 크리스천 영성의 위기와 페터레인 성령체험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되었던 금년 부활절연합예배 설교자 옥한음 목사(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전도의 문이 막힌 원인이 한국교회 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작은 예수가 되지 못함에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렇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은 많으나 예수를 본받는 작은 예수가 되어 가는 성도들은 심히 적은 것이 심각한 문제다. 예수처럼 살기 위해 영적으로 성숙해가지 못하고 영적 어린이 상태에 그냥 머물러 있는 성도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새들백교회 담임목사 릭 워렌이 쓴 『목적을 지향하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이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 책에서 워렌 목사는 다음과 같이 21세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위기를 지적하였다: “슬프게도 수백만의 기독교인들이 나이는 늙어 가고 있지만 영적으로 성숙해 가지 못한다. 그들은 기저귀와 소아용 발싸게를 착용한 채 영적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결코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의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역시 옥 목사의 지적과 동일한 것이다. 한국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세계 크리스천들의 가장 큰 영적 위기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영적으로 자라 가는 작은 예수운동의 결여라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웨슬리신학적으로 말할 때 성화(sanctification)지향적 영성의 부족이라고 우리는 분석할 수 있다. 오늘날 성결교회 교인들이나 감리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웨슬리의 성화를 이해하고 성화를 추구하는지 의심스럽다. 20세기까지 한국교회 부흥회의 주제는 거듭남이었지 성화가 아니었다. 한국교회 부흥회 포스터마다 거듭남은 부흥회 주제로 써왔지만 성화라는 주제를 써 놓은 포스터를 필자는 본 적이 없다. 이제 21세기에는 부흥회의 주제가 성화가 되어야 한다. 우리 웨슬리안들이, 웨슬리가 거듭남을 체험하였던 올더스게잇 체험은 해마다 기억하고 기념주일을 지키지만, 그가 성화를 체험한 페터레인 체험은 거의 모르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페터레인 체험이 어떤 사건이고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그것을 오늘날 21세기 교회적 상황에 잘 응용하고 부활시켜 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21세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살 수 있고 세상사회 속에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성숙하고 양적으로 성장하여, 전도의 문을 다시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페터레인 성령체험이 무슨 사건이었는지 고찰하여 보자.



페터레인(Fetter Lane) 성령체험:



웨슬리는 올더스게잇 체험과 다르게 페터레인 체험을 그의 일기에서 짧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올더스게잇 체험이 거듭남의 사건이라면, 페터레인 성령체험은 성화의 사건이다. 올더스게잇 체험이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페터레인 체험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올더스게잇 체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면, 페터레인 체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는 사건이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거듭남”(New Birth)에서 물세례를 육적 세례으로 보았고, 거듭남을 성령세례(spiritual baptism)로 보았다. 그리고 성화는 성령충만으로 웨슬리는 해석한다. 성령세례는 영적 탄생을 일으키는 일회적 사건이지만, 성령충만은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성화의 출발이요 입구이기에 성화가 올더스게잇 사건 이후로 시작되었지만, 결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성화를 체험하기 시작한 것은 페터레인 사건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그날 페터레인에서 일어났던 성령체험을 웨슬리의 일기에 나타난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739년 1월 1일(월) 미스터 홀(Mr. Hall), 킨친(Kinchin), 잉함(Ingham), 휫필드(Whitefield), 허친스(Hutchins), 그리고 나의 동생 찰스가 우리의 형제(모라비안) 60여 명과 함께 우리의 페터레인 애찬회에 참석하였다.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새벽 3시까지 계속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쁨으로 소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떨어졌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경외와 놀라움으로 사로잡힌 다음 우리는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주님이 되심을 깨달았습니다.”

이 놀라운 성령체험은 애찬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특이하다. 후에 웨슬리는 성찬과 애찬회가 은총의 수단이기에 누구에게나, 세례 안 받은 사람들에게도 성찬을 주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어머니 수잔나도 성찬을 받다가 거듭남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함께 성령을 체험하였던 잉함(Ingham)은 후에 루터주의적 경건운동주의자 곧 모라비안교도가 되었다. 휫필드(Whitefield)는 후에 칼빈주의자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ts)의 지도자가 되었다. 후에는 서로 신학적 차이 때문에 갈라섰으나, 이날 함께 성령의 놀라운 체험을 가졌다는 것이 특이한 사건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놀라운 성령체험도 웨슬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제거할 수 없었다고 타이어만(Tyerman)은 강조한다. 3일 후 1739년 1월 4일 일기에서 “나는 끊임없이 은총의 수단을 20년 동안 사용하였으나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영적 확증을 얻기를 원했다고 타이어만은 주장한다. 웨슬리는 영적 성숙을 확증시켜주는 성령충만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월 5일 7명의 감리교회 목회자들이 이스링톤(Islington)에서 모임을 가졌다. 기도와 금식 후에 제비를 뽑아 우리 속에 위대한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충만한 확신을 갖고 헤어지자고 휫필드가 제안하였는데 웨슬리가 브리스톨의 옥외설교자로 제비 뽑혔다. 그리고 1월 7일 페터레인신도회에서 또 다른 애찬회를 갖고 밤새도록 기도와 감사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고 타이어만은 증언한다. 애찬회와 철야기도회와 새벽기도회와 영성일기와 말씀묵상기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령충만을 웨슬리는 사모하였다. 헨리 랙(Henry Rack)은 웨슬리는 옛 옥스퍼드 시절의 규칙적인 고교회적인(high church) 영성수련을 유지하면서도 이 체험에서 그의 저교회적인(low church) 특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지적한다.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고 크리스마스절기에는 페터레인에서 매일 성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찬은 확증하게 하는 은총의 수단일 뿐 아니라 거듭나게 하는 은총의 수단임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즉흥기도와 즉흥설교와 통성기도 등 저교회적인 방법으로 성화를 추구하는 성령충만을 사모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처럼 웨슬리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성령의 은사 체험의 사건들이 계속하여 일어났지만, 웨슬리는 은사체험적 오순절적(charismatic pentecostal) 성화체험보다는 인격적 성결(personal holiness)을 추구하는 성화체험을 더욱 사모하고 더욱 강조하였다. 그러니까 은사체험을 추구하는 오순절적 순복음교회도 웨슬리의 후예고, 인격적 성결을 추구하는 성결교회나 감리교회도 웨슬리의 후예이다. 지금까지 20세기에 한국교회가 전자를 너무나 많이 강조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21세기는 전자와 후자가 통전적으로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은사를 체험한 능력 있는 성도들이 예수처럼 생각하고 예수처럼 성품이 변화되어가고 예수처럼 사는 모습을 세속사회 속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세속 불신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지만, 예수께서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지만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성도들을 나는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이러한 크리스천을 형식적 크리스천(Almost Christian)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또한 웨슬리의 성화론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 가는 의로움과 거룩함(엡 4:24)이기에 날마다 작은 예수화 되어가기 위해 산상수훈을 성화의 교과서로 애용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를, 성화를 체험한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강조하며, 완전성화를 체험한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도 강조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과 절제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가장 중요한 성화의 열매로 웨슬리는 강조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성령의 9가지 은사를 9가지 열매보다 더욱 강조하는 경향이었다. 다분히 성화론적이기보다 은사체험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은사체험적인 것이 우리의 인격을 예수화 하기 위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나타나야함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특히 고린도전서 13장을 성화의 중요한 본문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화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완전 성결만 아니라 완전사랑으로도 나타나야 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과 생활의 성결이 온전히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열망하고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부흥회적 순간적 성령충만과 성화를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사모하여 왔는데, 이제는 순간적이면서도 점진적인 성화를 추구하여야 한다. 매일 매일 나의 죄악성과 잘못된 습관과 왜곡된 성격이 죽어지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페터레인신도회(Fetter Lane Society)의 분열:


이제는 웨슬리가 성령체험을 한 페터레인신도회가 어떤 모임인지를 살펴보고, 성화론의 차이 때문에 어떻게 나누어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옥스퍼드 감리교인들의 신성클럽(Holy Club)도 감리교회신도회(Methodist Society)라고 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신도회의 모습은 웨슬리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뒤였다. 1738년 존 웨슬리와 피터 뵐러(Peter Boehler)는 감리교도와 모라비안교도를 함께 묶어서 페터레인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만들었다. 본래는 1737년 그의 친구 제임스 후턴(James Hutton)이 신도회를 페터레인에서 구성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후턴의 집에서 모였고, 나중에는 페터레인에서 모였다. 또 다른 모임이 페터레인에서 분가하여 구성되었는데, 역시 후턴에 의해 올더스게잇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이 모임에서 웨슬리가 회심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다가 피터 뵐러와 웨슬리가 회심 후 함께 모라비안과 감리교도를 합쳐서 페터레인신도회를 만들었다. 매주 수요일 40-50명이 모여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노래와 기도로 시작하고 노래와 기도로 끝맺었다.

올더스게잇 거리에서의 거듭남의 체험이 있은 지 얼마 후, 웨슬리는 독일의 마린보른과 헤른후트에 있는 모라비안공동체를 방문했다. 그는 이 방문을 오랫동안 고대해 왔었으며, “나는 나의 남은 여생을 기꺼이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그는 9월 12일 일기에 적고 있다. 웨슬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후에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조직유형 중 영성훈련과 찬양을 중심으로 모인 조직인 11개의 합창단(Chior)에서 밴드(band) 등을 감리교 조직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1738년 9월 17일 새로운 확신을 얻고 영국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웨슬리는 모라비안 센터 헤른후트를 방문한 후에 모라비안들의 정숙주의(quietism)와 신앙제일주의를(solafideism) 비판하게 되었다. 곧 신앙의인화만을 강조한 나머지 사랑과 선행을 성화의 과정에서 전혀 배제하는 정숙주의적 경건에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이다. 이 모라비안들과의 논쟁의 핵심적 신학사상의 차이는 웨슬리와 진젠돌프의 라틴어논쟁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곧 진젠돌프는 성화나 완전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지는 수동적 순간적으로 전가되는 체험(imputation)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웨슬리는 수동적일 뿐 아니라 본성적이고, 순간적일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됨으로써 성도 안에서도 성화나 완전성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impartation)을 주장하였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작은 예수로 인격적 영적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만 아니라 사랑 안에서도 영적으로 자라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다고 웨슬리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진돌프는 성화는 사랑이나 선행은 필요 없고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모라비안 지도자 몰더(Philip Henry Molther)와도 웨슬리는 논쟁하였다. 몰더는 1739년 가을 페터레인신도회 내에 참 종교가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은총의 수단을 그만 두어야 하고, 모든 경건의 선행도 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신 시편 46:10 말씀에 따라 주님 앞에서 조용히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몰더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을 가질 때까지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런 은총의 수단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이것이 율법폐기론에 빠지게 만든다고 공격하였다. 악행을 피하는 것, 선행을 실천하는 것,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삼중적으로 성도의 영성생활에 필요한 것임을 웨슬리는 힘주어 강조하였다. 이것이 모라비안뿐 아니라 칼빈주의자들과의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논쟁들로 말미암아 모라비안과 감리교도가 분리하게 되었다. 1740년 7월 18일 웨슬리는 그의 지지자 75명과 함께 페터레인신도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미 런던에서 1739년 12월에 감리교신도회가 구성되었는데, 이것을 ‘런던 파운데리 신도회’(London Foundery Society)라고 부른다. 이 신도회는 런던 최초의 감리교회 본부를 지었다. 그러다가 이 건물은 인쇄소가 되었고, 이것이 파운데리라는 이름에서 ‘웨슬리예배당’(Wesley’s Chapel)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새롭게 씨티로드에다 건물을 짓게 되었다. 1776년부터 계획하고 1777년에 기초공사를 하고 1778년 11월에 입당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실상의 ‘세계감리교회의 어머니교회’가 되었다. 이 예배당보다 먼저 지어진 감리교회 최초의 예배당인 브리스톨 ‘새 회당’(New Room)은 칼빈주의 감리교도들이 사용하게 되어서 사실상의 세계감리교회 예배당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감리교회가 이 건물을 다시 사서 관리하지만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다. 예배를 드리려면 비용을 지불하고 1시간씩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필자와 함께 10여 명의 학생들과 감리교 목회자들이 지난 2월에 방문하였을 때 예배를 드렸는데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큰 은혜를 체험하였다.

나오는 말: 성화 중심의 영성

결국 휫필드를 비롯한 칼빈주의자들과 잉함을 비롯한 모라비안 루터주의자들과 함께 페터레인 성령체험을 통해서 성화를 경험하였지만, 웨슬리안들은 그들과 다른 성화론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웨슬리를 비롯한 초기 웨슬리안들은 신앙제일주의와 정숙주의와 율법폐기론의 위험성을 느끼면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과 속죄와 의로움과 성결함을 사랑과 선행으로 실천하는 인간적 응답으로 성화를 이루어감을 절실히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성격마저도 그리스도의 성품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작은 예수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이것은 자연히 사회적 성결로 이어졌다. 웨슬리는 그의 찬송가 편집 서문에서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모른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농부와 광부와 노동자 속회를 만들고 그것이 인류 최초의 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하였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는 노예제도 반대운동으로도 발전하였으며, 교도소제도개혁운동과 여성설교가 임명운동(Sarah Mallet, Sarah Crosby, Mary Fletcher 등)으로도 발전하였다. 그래서 웨슬리의 초기감리교회운동은 18세기 영국사회의 빛과 소금의 운동이 되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나 엘리 할레비(Elie Halevy) 같은 프랑스 역사가들이 프랑스 혁명 같은 혁명의 위기에서 감리교회운동이 영국사회를 구원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성화운동과 사회적 성화운동이 21세기 한국과 세계 크리스천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 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올더스게잇 거듭남의 체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페터레인 성화의 체험에로 나아가는 웨슬리안들이 되어야 한다. 일회적인 성령충만의 성화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부단히 성화의 성령충만을 체험하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불을 붙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와 같은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외침은 21세기적 웨슬리의 성화론적 설교라고 볼 수 있다: “영적 성숙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결단이다. 당신은 성숙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숙하기를 결단하여야 한다. 성숙하기를 노력하여야 한다. 성숙을 추구하여야 한다. 제자됨 -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의 과정 - 은 항상 결단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웨슬리가 그의 말년에 쓴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의 내용과 너무나 유사하다. 우리 안에서 성령이 성화를 이루어 가실 때 우리도 성화를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인신협조설(human-Divine cooperation)이 아니라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Divine-human cooperation)이다. 우리는 항상 성화를 일으키는 성령충만의 뜨거움을 항상 사모하여야 한다.

(활천 2004년 8월호)
http://sgti.kehc.org/data/person/wesley/1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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