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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 신자의 회개

본문

신자의 회개
The Repentance of Believers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 1:15)

I
회개와 믿음


1. 기독교의 문(gate)

회개와 믿음은
기독교의 문(gate)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에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사도에 의하여 확인된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 신자들에게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권면하면서
신앙의 초보적인 면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관한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려면
    처음에 가졌던 모든 생각을 순차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회개와 믿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기서 회개라 함은
죄성(罪性)과
죄책(罪責), 그리고
무력함에 대하여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게 하기 위해선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믿음에 선행(先行)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나라,
곧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과 희락(로마 14:17)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은혜안에 머물기 위한 회개와 믿음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을 믿은”(마가 1:15) 후에도 필요한
회개와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이 때에는
    이 말들이 전에 사용했던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입니다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다른 의미는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 속 모든 단계에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여 진 경주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회개와 믿음”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 머무르며 성장하기 위해서도,
“회개와 믿음”이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회개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입은 후에도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장 주의 깊게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1.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

회개는
내적 변화,
곧 죄에서 거룩하여지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전연 다른 의미에서 이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일종의 자아인식으로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해도
나는 내 죄에 대한 책임이 있고, 
나는 무능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이것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

즉 죄인이 되었던 우리들이
예수님의 보혈에 의한 구속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처음으로 비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우리의 죄가 가려질 뿐 아니라
멸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어떤 악한 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는
이제 내 마음에 아무 악도 없다고 망설임 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악은 그 때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하여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입을 때
전적으로 성결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성경이나, 이성(理性)이나, 체험에 반대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죄는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입을 때에
멸절된다고 진실하게 믿으며,
열심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속에는 죄가 없으므로
그 순간부터 온전히 깨끗하다고 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자라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죄에 대하여 느끼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죄가 지배하지는 않지만
죄의 쓴 뿌리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2. 남아 있는 죄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 죄(쓴 뿌리)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
지금 말하는 “회개”에 속하는 것입니다.

1) 교만

모든 죄는 없어졌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불과 얼마 안 가서
자기 마음속에 아직 교만이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자기가 마땅히 생각하여야 할 것보다,
자기를 더 높이 생각하고

또한 자기가 받은 어떤 칭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더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교만을 품게 되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압니다.

하지만 
또한 자기가 아직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 확신을 내버릴 수도 없고
또한 결코 내버려서도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아직도”
그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2) 고집(Self Will)

또한
그는 얼마 안 가서
자기 마음속에 자기의지,
곧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다른 의지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의지란
인간에게 이해력이 있는 한,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각 있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사람으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간 의지는 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지,
아주 심한 환난 중에서도
우리 주님은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종종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어느 정도 높이곤 합니다.

때때로
나의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 성질에 맞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하고자 합니다.

또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도
자기에게 고통이 되므로 하기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믿음 안에 머물면서
전력을 다해 싸운다손 치더라도,
죄가 여전히 존재하며
또한 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지는
교만과 마찬가지로 우상의 일종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직접 반대됩니다.

3) 세상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도 그와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참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역시 이것을 그들 마음속에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세상 사랑을 많은 경우에 느끼게 됩니다.

그가 처음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을 때”
그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더 원치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진실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소원은 주님께만 있고
    주님의 성호를 기억하는 데 있나이다.”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4) 정욕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얼마 안 되는 순간일지는 모르나,
그는 다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혹은
“이생의 자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계속하여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정욕이 다시 살아남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정욕은 그를 타락시키려고 고통을 줄 것이며,
마침내 그를 무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는 무질서한 정욕,
즉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강한 정욕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피조물이란
자녀나 부모, 남편이나 아내
또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의 것이나 향락을 사랑한다는 것을
매우 자주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말하지 않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향락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자는
매 순간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목의 정욕을 갖게 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무엇인가 크고,
아름답고,
귀한 것에 대한 욕망입니다. 

이 정욕이
얼마나 여러 모양으로
우리 영혼을 공격합니까?
아마도 우리는
의복이나 가구 같은 사소한 것으로
불멸의 영혼을 만족시켜 보려고
계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경험한 후일지라도
쓰면 없어지고 마는 유한한 것들에 대한
어리석은 욕망에 다시 빠지는 수가 흔히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신자들일지라도,
  “안목의 정욕”중 하나에 불과한
  “호기심”조차도 발로 짓밟으며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단지
새로운 것이란 이유로 갖게 되는
“호기심”하나도
그것을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일지라도
이생의 자랑을 온전히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도 요한은
이 말을
세상에서 말하는 “명예욕”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사람에게서 얻는 명예를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
즉 칭찬에 대한 욕망과 사랑인데,
그것은 항상 세상 사람의 비난에 대한 공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것과 병행되는 것은
악한 수치(evil shame)인데,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영광으로 삼아야 할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악한 수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음으로,
우리 영혼에게 매우 큰 유혹이 됩니다.

심지어 믿음이 강한 사람들조차도
그 안에 이런 악한 성질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낍니다.

물론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졌으나,
부분적으로 못 박힌 것일 뿐,
이 악의 뿌리는 여전히 저들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5) 질투 / 의심 / 분노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대하거나
이웃도 사랑하지 않으려는 다른 본성들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이웃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질투, 그릇된 의심, 근거 없는 의심, 이치에 맞지 않는 의심,
이런 것들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형제 사랑과 반대되는 이런 본성을
때때로 느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만약 우리 마음에
악과 증오와 무자비는 없다할지라도,
아무런 시기심도 없습니까?

특별히,
원하지만 할 수 없었던 어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사람을
시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해를 당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
특히 우리가 각별히 사랑했고 도와주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런 사람에게서 해를 받고 모욕을 당할 때에도
분노를 느끼지 않습니까?

불법하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선으로 악을 이기는”대신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충동을 받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정리해 볼 때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이웃에 사랑에 대한 반대되는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6) 탐심

탐심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어느 정도이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분명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원어로 “필라르구리아”(Φιλαργυρία)
곧 돈을 사랑한다는 말로
“만악(萬惡)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플레오넥키아”(πλεονεζία)
곧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
또는 재물을 늘리려는 욕심으로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반대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지만
이런 데서부터 전적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내 속에 어떤 탐심도
    거듭난 이후만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치고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예수님은 제외하고)
이 탐심을 안 가지고 있었고
또 탐심 없이 태어난 사람은 루터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주저 없이 말씀 드립니다.

나는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도
시일이 지난 뒤에
이 탐심을 단 한번이라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탐심이
교만, 자기의지, 분노와 함께
의롭다 칭함을 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 없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진지한 사람들이
로마서 7장 마지막 부분을
율법 아래에 놓여서 죄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칭함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고
이해하게 된 것은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말하였으리라고 보이는데)
틀림없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체험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곧 의롭다 칭함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느 정도 육에 속한 마음이
  (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에게“너희는 육에 속하였다”하였듯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탐심은
타락을 향한 마음,
즉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려는 마음이며
교만, 자기의지, 분노, 복수심, 세상사랑,
혹은 갖은 악을 사랑하는 그런 성벽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순간이라도 굴레를 벗기면
곧 솟아오르려는 “쓴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패성은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밝은 빛이 없으면 알 수도 없는
저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신자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런 모든 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의롭다 칭함을 입은 신자들에게 속하는 회개입니다.

7) 험담 / 고자질 / 수근거림 /  악담

죄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면
이 죄가 또한 우리들의 모든 말과 행실에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그 많은 말들이 죄로 섞여 있을 뿐 아니라
그 말들 자체가 전적으로 죄 성을 띠고 있음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말은 의심할 필요 없이 사랑이 없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형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    하라”는 황금률과 일치되는 것들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이요,
고자질하는 것이요,
온갖 수근 거리는 것이요,
악담하는 것,
즉 사람 없는 데서 그 사람의 흠을 말하는 것들입니다.

아무도 그 사람이 없을 때 그 사람의 흠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신자들 중에 범죄 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죽은 자와 현재 없는 자에 대하여서는 좋은 것만 말하라”고 하는
옛 사람의 도덕률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설사 이것들을 행한다고 해도,
무익한 말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모든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죄 된 것이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쓸데없는 말도
후일 심판의 날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계속하여 깨어서 기도함으로
이런 시험에 빠지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입술을 지키며
그들의 모든 말이 은혜 안에 머물고,
듣는 자에게 끼칠 은혜를 채운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들이 온갖 주의를 다 기울인다 해도
매일같이 익힌 변론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는 일이 없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서 말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말은 불결한 것이 없는 정결한 말들입니까?

그 동기에 있어서 그릇된 것은 전혀 없습니까?

자신들의 기쁨을 위해서는 조금도 말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서만 말합니까?
자기의 뜻은 조금도 행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전적으로 행하고자 합니까?
또한
처음에는 그리스도만 바라봄으로 시작하였을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이웃 사람들과 대화하는 가운데도
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과만 말합니까?

남의 죄를 책망할 때
죄인에 대하여 분노를 말한다든가
불친절한 기분을 느낀다든가 하는 일이 전혀 없습니까?

어떤 무지한 자를 훈계할 때는
자만하거나 자기를 좀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고통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할 때,
또는 서로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자고 권면할 때,
속으로 지금 나는 말을 참 잘하였다고 스스로를 높이는 일은 없습니까?

또한 허영 된 생각은 없습니까?

이와 같이
신자들의 가장 좋다는 말에도
죄가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속하는
회개의 또 다른 면입니다.

8) 행동

저들의 양심이 철저히 깨어 있다고 하지만
저들의 행동에 굳혀진 죄를 얼마나 많이 인식하게 됩니까!

그 행동이
세상에서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볼 때
칭찬받을 수 없고
또한 변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신자들의 행동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 삼지 않은 것,
즉 하나님을 고려하지도 않은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행동 가운데는
하나님께만 마음을 쏟는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자기를 더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한 일이 많지 않습니까?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어떤 옳지 못한 마음을 느낀 적 없습니까?
이런 이유로,
소위 선한 행동이라는 것조차,
엄격히 말해서 악에서 완전히 떠나고
자비에서 오는 일들과는 아직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같은 것 아닙니까?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종종 구원보다는
정죄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자 할 때,
종종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 엄숙해야 할 예배에 참여하였을 때,
혹은 성만찬에 참여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릅니까?

어떤 때는 마음이 땅 끝까지 방황하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바나 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으로 채워질 때는 없습니까?

그래서 믿는 자들 가운데는 지금
가장 악한 죄에 대하여 부끄러워했던 것보다
더욱 자기들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합니다.

9) 태만

또한 저들은
얼마나 많은 태만의 죄(sins of omission)를 짓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도의 말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나
저들은 자기 원수들에게,
혹은 
나그네나 형제들에게,
육신에 관하여나 영혼에 관하여 선을 행할 수 있었으나
행하지 않은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너무도 태만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죄책감을 느껴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듣는 일에 있어서
또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기회를 등한시 여겼습니까?

그러므로 
성인(聖人) 어숴 감독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수고를 마친 뒤
거의 죽어가는 숨소리와 함께 외치기를
  “주여! 나의 태만의 죄를 용서하소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태만 외에도
저들 속에 있는 내적 부족을 수없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과 경외와 신뢰의 부족,

이웃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의 부족,

자기 형제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의 부족, 

멀리 떨어져 있는 이에게나
직접으로 관계되고 있는 이에게나 사랑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들은 마땅히 가져야 할
어느 정도의 거룩한 본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 부족합니다.

이런 것을 깊이 의식하는 가운데 우리는,
M. De 렌티와 함께
  “나는 가시로 가득 뒤덮여 있는 땅입니다”라고 외칠 지경입니다.

욥과 함께
  “나는 미천하도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욥기42:6)라고 외칠 지경입니다.

이처럼 죄에 대한 책임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 속하는 회개의 또 하나의 면입니다.

3. 대언자이신 예수님

그러나
회개는 조심스럽게 또는 각별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곧 그리스도를 믿고,
육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걸어가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믿기 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지금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앞서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죽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속하시는 보혈이 아니라면
저들은 정죄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죄는 저들에게서 옮겨졌지만,
아직도 그 정죄를 당연히 받아야 마땅하다고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의 극단이 있습니다. 
  (이 양 극단을 피해 나가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이렇게 두 극단 중에 빠져서,
사실은 정죄 받지도 않는데
자기는 정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는 마땅히 정죄에서 벗어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어느 편으로든 양 극단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두 극단의 중간에 있습니다.
저들은 엄격히 말한다면 지옥의 저주를 받기에 마땅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그들 위에는 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계신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의 중보 기도가
여전히 저들과 정죄 사이에 있는 까닭입니다.

4. 인간의 무력함

우리가 아주 무력함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또 하나의 면입니다.
이 무력하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입기 전에
스스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거나
선한 것을 원한다거나
선한 말을 하거나
선한 일을 하나도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지금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신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종류, 어떤 정도의 것이건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즉 선을 행하고 악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이 세상,
마귀,
아니 자신의 악한 성질을
대항하고 정복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원수를 정복시킬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부거나 일부거나 간에
자연에서 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여러 해를 위하여 곡식을 곳간에 쌓아두듯이
한 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주어지는 힘입니다.

둘째로, 신자가 무력하다는 말은
우리가 아직 의식하고 있는 바
죄의 책임이나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도저히 구출할 수 없는 절대적 무능함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은혜를
  (우리의 자연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도 거듭난 자들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는 것들,

우리가 경험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교만,
자기의지,
세상사랑,
분노,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려는 일반적인 성질(버릇)
그 어떤 것도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없애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말과 행동에 고착되어 있는
악도 없앨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즉 의롭다 칭함을 입은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마음과 생활에서
이런 죄들을 없앨 수 있다고 믿으시거든
실험을 하여 보십시오.

과연
그가 이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이 교만이나 자기의지,
혹은 타고난 죄를 내어 쫓을 수가 있는지, 없는지
실험하여 보십시오.

평상시 쓰는 말이나 생활 속에서 악을 깨끗이 제거 할 수 있는가,
혹은 모든 태만의 죄와 함께 섞여 있는
무자비하고 합당치 않은 말들을 피할 수가 있는지
시험하여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자신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지
시험하여 보십시오.

한두 번 시험하여 보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하여 시험하여 보십시오. 

오랫동안 해 보면 해볼수록
그는 이 모든 면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널리 흩어져 있고
여러 점에 있어 다른 차이가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죽이고
안과 밖의 죄를 정복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매일 매일 약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것들은 완전히 내어 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받은 은혜를 가지고는
우리들은 그것들을 완전히 내쫒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깨어서 열심히 기도한다 하여도
우리의 마음과 손을 전적으로 깨끗이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 번
곧 두 번째로“깨끗하여지라!”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 깨끗하여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만 그 악의 뿌리, 육의 마음은 멸절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타고난 죄는 생존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믿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얻은 후에도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회개를 하기 전에는 더 깊이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병을 알 때까지
그 병의 치료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회개를 하면
우리는 복음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특별한 의미에서,
즉 의롭다 칭함을 얻기 위하여
믿은 것과는 다른 뜻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1.  구원의 기쁜 소식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마련하신
큰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히브리서 7:25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에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태만의 죄에서 당신을 구원하시며
당신이 결핍한 모든 것을 보충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이며 사람이신(God-Man)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셨으므로,
그가 행하시며
또한 이루시리라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능력이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가장 강력한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지극히 크고 귀중한 약속을
구약과 신약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장 오랜 계시의 말씀인 율법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라”(신명기 30:6).

또한 시편에서도 말씀 하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그들의 모든 죄에서 구속하시리라”(25:22).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움에서 구원하리라”(에스겔36:25 이하).

신약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으니…
    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를 이루어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려 함이라”(누가1:68 이하).

그러므로 당신은 믿어야 할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것을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쁨으로 하고자 하십니다.

당신을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을 온갖 불결한 데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지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 특별히 필요로 하는 믿음입니다.

즉 위대한 의사이시요
내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께서
나를 지금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을 내일 하시고자 하십니까,
오늘 하시고자 하십니까?

주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다.
  “오늘날 너희가 내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만일
이를 내일로 미룬다면 마음을 강퍅케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당신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

지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깨끗하여지라.”

믿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주사
나무 위에서
당신의 죄를 자기 몸에 친히 감당하신
예수님을 계속하여 믿으십시오.

2.  예수님의 보혈

주님은
항상 효력이 있는 그 보혈로 인하여
당신을 모든 정죄함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은 상태에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가고,
내 안에 있는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고,
모든 불결함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들은
전에 느꼈던 모든 죄책과 형벌에서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됩니다.
  “주여, 순간순간 나는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죽음과 공로를.”

그 뿐 아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부르게 됩니다.
  “주여, 순간순간 나는 갖습니다.
    당신의 죽음의 공로를.”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의 중보의 기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순간 새로워져서 아주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전에 있었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3.  삶의 인도자 되시는 예수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느낍니다.

오늘의 우리가 됨도 오직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이 믿음에 의해 우리는 영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모두 거룩하다 할지라도
다음 순간에는 악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있는 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시오,
믿음으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심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계속하여 도우심으로
믿는 자들의 행하는 모든 것을 인도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든 계획과 행동이
예수님 안에서 시작되고 계속되며 마치게 하십니다.

또한 
그는“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씻으셔서
저들이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으며,
그의 성호를 가치 있게 높일 수 있게 하십니다.

4.  회개와 믿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회개와 믿음은 바로 피차간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으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에 고착된 죄를 느끼며,

믿음에 의하여 마음을 정결케 하며,
손을 씻어 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회개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본성, 말, 행동이
아직도 형벌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믿음에 의하여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늘 중보기도 하고 계심으로
계속적으로 우리의 정죄와 형벌을
다른 데로 돌리고 계심을 의식하게 됩니다.

회개에 의하여
우리 안에는 아무 힘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늘 깨닫는 것이며,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자비 뿐 아니라 곤고할 때 도우시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회개란 그 외의 다른 곳에서는 도움이 없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곤고할 때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말합니다.
주님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믿음은 말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영혼의 모든 원수를 정복할 뿐 아니라 내어 쫓을 수 있다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내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나는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걸을 수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 알아야 할 것들


1. 여전히 남아 있는 죄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여러분은 그런 견해,
곧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을 때 온전히 성별되고
마음은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것을 손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 때에 우리는 외적 죄의 지배에서는 구원된 것입니다.

또한 그 때에
우리의 내적 죄의 힘도 깨어져
이제는 죄를 따를 필요도 없고 이끌릴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 죄가 그 때에
전적으로 멸망되었다는 것,

바꿔 말하면
그 때에
우리의 교만, 자기의지, 세상사랑, 분노의 뿌리가 마음에서 제하여지고
육에 속한 마음과 타락으로 향하는 마음이
온전히 끊겼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리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이와 반대로 생각하는 것 역시 거짓되고 해로운 오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견해는 막대한 해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이는 더 이상의 변화를
막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한 사람은 의원이 쓸 데 없고
병자라야 의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미 온전히 성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이상의 치료를 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가정(假定)에서는
우리가 죄에서부터 그 이상의 구출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완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

그와 반대로 우리는 아직도 완전해지지 못하였고,
우리 마음은 완전히 정결하여지지 못하며,

우리 마음에는 아직 그 본질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육의 생각이 남아 있다고 깊이 깨닫는 것은,

즉 우리 마음에 있는 죄 덩어리가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 멸망되지는 않았다고 깊이 깨닫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 이상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얻는 그 순간,
즉 거듭나는 그 순간에
우리가
  “흑암에서 광명한 빛으로,”

곧 잔악한 마귀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땅에 속한 감각적인 악마적인 생각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의 내적인 변화를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의로 바뀌어졌지만,
완전과는 아직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직 죄의 깊은 데 머물러 있어
우리들로 하여금 구원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삶 가운데 온전한 구원을 위해 신음케 하는 것을 의식합니다.

3. 온전한 성결

그런 까닭에
마음속의 이 깊은 부패를 깨닫지 못한 신자들,
또는 깨달아도 개념적으로만 가볍게 깨닫는 신자들은
이 온전한 성결에 대하여 관심이 적은 것입니다.

저들은 그런 체험이 죽을 때에나,
또는 죽기 전이지만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때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이 체험이 없다하여
그리 초조하지도 않고
그 체험에 대한 열망도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회개하기까지는,
혹은 하나님께서 타고난 괴물의 껍데기를 벗기어
그들 영혼의 진상을 나타내 보이시기 전까지는,
저들은 결코 이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느낄 때에만
저들은 그 죄에서 구원받고자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만
저들은 영혼의 고민 가운데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될 것입니다.
      속에 있는 이 죄의 멍에를
      벗겨 주옵시고
      내 영을 온전히 해방시켜 주소서.
      나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내 속이 정결하여지고
      내가 전적으로 당신에게 안겨질 때까지는.

4. 보혈의 능력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의롭다 하심임을 얻은 후에도
우리의 죄과(罪過, demerit)
  (어떤 의미에서는 죄책이라 할 수 있겠지만)
를 깊이 깨닫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대속하시는 보혈의 참 가치를 볼 수 있게 되며,
이 보혈은
우리가 전에 필요하였던 것과 같이
지금 의롭다 하심을 입은 후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이 언약의 보혈을 그저 그런 것이라고,

즉 우리 과거의 모든 죄는 사라졌다고 여기고,
지금은 별로 필요치 않은 어떤 것으로
여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이와 같이 깨끗하지 않다면,

여기에는
우리와 순간순간 관계되어
마침내는 우리들로 하여금
순간순간 새로운 정죄를 받게끔 하는
어떤 죄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영원히 위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며
      모든 것을 구속하시는
      그의 귀한 사랑, 그의 귀하신 보혈로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나니.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이 회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음의 시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는 숨을 쉬는 순간순간
      죄를 짓습니다.

      이 땅 위에 있는 나는
      당신의 뜻을 행치 못하며
      규례도 지키지 못합니다.

      천사는 하늘에서
      이를 행하고 있건만;
      그러나 샘물터는 아직 열려 있어
      내 발을 씻고
      마음과 손을 씻어 줍니다.

      내가 세상 안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5. 우리의 무력함과 주님의 크신 능력

중생 후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아주 무력함을 깊이 깨닫는 것,
곧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도 의지할 수 없으며
더구나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남아 있는 악의 세계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제사장인 동시에 왕으로 모시고
참으로 의지하고 살도록 가르쳐 줍니다.

이로써
우리는 진실로 주님을 존귀케 하고
그의 모든 은혜의 영광을 그에게 돌리며,
그를 온전한 그리스도, 온전한 구속주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말들은
너무 자주 사용된 까닭에 거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삼켜짐을 받기 위하여 자신을 도외시 할 때에,

즉, 주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 되게 하기 위하여
아무 일에도 빠지지 않을 때
강하고 깊은 의미에서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하나님보다도 더 높이려는 모든 높은 것들을 철폐시킴으로
모든 본성, 생각, 말과 일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지경에 도달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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