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esley - 성령의 첫 열매 (1746)
본문
성령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174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4)
Ⅰ
서론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람들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즉 더 이상 부패한 본성의 충동에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the Spirit)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정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로 부터의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로 거저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지우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내면으로부터의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은 것은 ‘세상의 영’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들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2:12).
그리고
이 성령께서 그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롬8:16)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더하여
저들의 양심이 육적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단순함(simplicity)과 경건한 성실(godly sincerity)로
저들이 이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구절은 너무도 자주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배우지 못해서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벧후 3:16)
(οἱ ἀμαϑεῖς καὶ ἀστῄρικτϙι)
즉
하나님에 대하여 배운 것이 없고,
그 결과로 경건을 따르는 진리에 있어서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딛 1:1)이
이 성경구절을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일들이(벧후 3:16)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분명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며,
그래서 육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그들이 누구인지,
둘째로
어떻게 해서 ‘이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인지를
몇몇 실용적인 추론들을 이끌어 냄으로
결론을 낼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1. 예수님과 연합된 자
먼저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롬8:1)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그들이 아닌가요?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자들,
자신의 의(義)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義)를
믿음으로 받는 자들이 아닌가요?
그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이 자들이
마땅히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살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성령 안에서 주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접목되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습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와 연합되어 있듯
그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머리로 깨달을 수도 없는 방식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2. 육을 따라 살지 않는 자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으며,
육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통상적인 용법에 있어서
육체는 부패한 본성(corrupt nature)을 의미합니다.
그런 뜻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갈5:9)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고,
그 조금 전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욕망)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
라고 했습니다.
이것,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더 쓰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절)”
이 구절(ἵνα μὴ ἅ ἂν ϑέλητε, ταῦτα ποιῆτε)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는 너희가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가
아닙니다.
이는 마치
육체가 성령을 이긴 것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번역은
사도 바울의 본래 글과 아무 상관이 없을뿐더러
그의 모든 주장을 가치 없게 만들고,
그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께 속한 자들은 육체의 정욕과 함께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육신의 모든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음행과 더러움”,
“부정과 호색”,
“우상숭배, 마술, 증오와 다툼”,
“시기, 분노, 당파심, 분열, 분파, 질투, 살인, 술 취함, 복수”
(갈5:19-21),
즉,
본성의 부패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이나 말이나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 쓴 뿌리를 느끼고 있지만,
그들은 그 쓴 뿌리를
지속적으로 발아래 밟을 수 있는 능력을
위로부터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 쓴 뿌리는
위로 올라와 그들을 괴롭히지 못합니다.(히12:15)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새로운 공격은
단지 그들에게 새로운 찬양의 기회를 주고,
다음과 같이 외치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줄 따름입니다.
“하나님 찬양 받으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3. 영을 따라 사는 자
이제 그들은
그 마음과 생활 양면에서 모두
영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성령에 의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그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사람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물이
솟아나는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그들은 모든 거룩한 욕망과
모든 하나님 같은 기질과
하늘에 속한 기질로 인도되며
마침내는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주님을 향한 성결이 됩니다.
(2) 언어의 성결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또한 그분에 의해 모든 대화가 성결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그들의 말은
언제나 은혜롭고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이 합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더러운 대화는 나오지 않고
오직 선하고 덕을 세우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기에 적합한 대화만 나옵니다.
(3) 행동의 변화
그리고 또 그들은
밤낮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만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의 모든 외적 행동에서
우리들에게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고
본을 남겨놓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힘씁니다.
그들의 이웃과의 모든 사귐에서
정의, 긍휼, 진실 안에서 걸으려고 합니다.
어떠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이들이 실제로 “성령을 따라 사는”(롬8:4)사람들입니다.
(4) 참된 열매를 소유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의 참된 열매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에서,
즉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 열매란
사랑과 기쁨과 평강과
오래 참음과 관용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랑할만하며,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들은
모든 일에서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의 복음을 빛나게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행3:15)
성령으로 행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Ⅲ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둘째로,
나는 어떻게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 자에게는
정죄 받는 일이 없는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1. 과거의 죄
먼저,
그리스도를 믿어 영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들의 과거의 죄 때문에 정죄 받지 않습니다.
과거의 죄 가운에
어떤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 때문에
그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죄는
마치 전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것들은
돌과 같이 깊은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것들을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한 속죄제로 그분의 아들을 주셨고,
그분의 보혈에 대한 믿음을 계기 삼아 하나님께서는
옛 죄들의 사면을 위해
그들에게 그분의 의(義)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죄의 어느 하나도 그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죄의 기억은
그러한 죄와 함께 소멸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 자신의 마음 안에 정죄함이 없습니다.
즉,
과거의 그 죄들로 인한 죄책감이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속에 이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혈을 믿음으로 얻는 유익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불확실성에 고문하듯이 고통스러워하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 속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양자의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므로
그들의 마음속은
하나님의 평화로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을
부단히 느끼고 있는 데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하나님의 긍휼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어두움이 그에게 닥쳐와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속량의 피에
자기가 참여되고 있다는
자기 안의 그 증거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그는 내적으로 정죄 받고 있으며,
그는 다시 마음속으로
죽음의 선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들 합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때에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빛, 즉 영혼 위에 빛나는 하나님의 빛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잃고 있는 한
그 사람은 믿음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심 없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는 사람도
믿음의 빛을 잃을는지도 모르는 것이요,
그것을 상실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시 정죄 받는 상태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지금 그 이름을 믿고 있는 자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한,
하나님도,
그들 자신들의 마음도
그들을 정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현재의 죄
다음으로,
그들은 현재의 그 어떠한 죄들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하는 것 때문에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부단한 증거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요일3:9).
하나님의 씨,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그 믿음이
그 사람 안에 여전히 있는 한은
그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그가 그 자신을 지키고 있는 한,
그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혀 범하지도 않는 죄들로 인하여
정죄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율법의 저주나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오직 그것을 파기하는 사람만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은
실제로 도적질하는 사람 이외에
아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은
이를 거룩히 지키지 않는 사람들만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부정하는 율법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사도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꼭 기억할만한 말씀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법대로 쓰기만 하면
좋은 것인 줄을 우리가 압니다.”
즉
다음의 사실을 알고 사용하면 좋습니다.
호키 디카이오 노모스 우 케이타이(ὅτι δικαίῳ νόμος οὐ κεῖται)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반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을 어긴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불경건한 자와
죄 있는 자와 거룩하지 않는 자와 속된 자를
재판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이것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보여 주는 것입니다.
3. 내적인 죄
셋째로,
그들은 내적인 죄 때문에 정죄 받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안에도
본성의 부패가 아직 머물러 있다는 사실,
그들 마음속에 교만과 허영,
분노와 탐욕과 악한 바램,
그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죄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일의 삶에서 경험되는 것이요,
절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즉 스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청중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갖게 된 사람이라고
즉시 그 앞에서 증언한 그 당시의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사도바울은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어서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고전3:1)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 아이(Baby Christ)라고 했으니,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낮은 수준의 신자였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얼마나 많은 죄가 그들 안에 남아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 육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 안에 육의 성품, 악한 본성을 느낄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을
날마다 더욱더 느낄지라도,
그들이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한,
마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한,
육신이 그들을 지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오히려 영을 따라 살도록
모든 죄, 교만, 분노, 욕망과 끊임없이 계속 싸우는 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정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진실한 복종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압니다.
4.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결함
그뿐만 아니라
넷째로 그들은 물론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죄가 단단히 붙어 있음을 끊임없이 확신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각에서나 말에서나 행위에서
완전한 율법을 성취하고 있지 못한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 하나님을 그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최선을 다하여
그 의무를 수행할 때에라도
다소간의 교만이나 고집이 가만히 스며들어 온다거나
뒤섞이거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그들이
큰 회중과 함께 모인다든지
마음의 모든 생각과 의향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은밀히 그들의 마음을 쏟아 붓는다든지 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사귐 속에서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방황한다든지
그들의 열정적 사랑이 죽어 있거나
활발하지 못하다는 것을
언제나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정죄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결함은
단지 그들에게 다음의 사실에 관한
보다 깊은 인식을 줄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귀에다 대고
그들을 위해서 변호해 주시는
샘솟는 보혈이 언제나 필요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대하여
영원히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저 대언자를 언제나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함은
그 믿어온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몰아내 버리는 일에서는 아주 거리가 먼 일이며,
오히려 그들이 매 순간 필요로 느끼고 있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하도록 몰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부족함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자는 간절한 갈망을 더욱 느끼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더욱 부지런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연약함의 죄
다섯째로,
그들은 소위 연약함의 죄(sins of infirmity) 때문에도
정죄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죄를 연약함과 결합시킴으로써
죄를 조금이라도 장려한다든지
혹은
죄를 어떤 정도로 가볍게 하려 한다고
생각되지 않게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부르는 편이
타당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처럼 불분명한
그리고 위험한 표현을 보유해야만 한다면
연약함의 죄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진실하다고 믿고 있는 사실을 말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될 경우와 같은,
고의 아닌 실패
혹은
아마도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고
의도했는데 알지 못하는 동안에,
혹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이웃을 해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충분하고
또 완전한 뜻에는 벗어나 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죄는 아니며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람의 양심에
적어도 죄책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연약함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가르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의 얼굴빛을 가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고 있는
그 전체적인 성격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6.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죄
끝으로
그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모든 사실 때문에
정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적인 본성의 것이든지
외적인 본성의 것이든지,
또는
그것이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든지
혹은 어떤 일을 행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주님의 성찬이 집행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 참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 그랬을까요?
당신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신은 정죄 받지 않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죄의 책임도 없습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원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가 가지지 않은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진 것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실로 신자는 어떤 때에는
그의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할 수 없어서
깊이 슬퍼하게 됩니다.
큰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일을 억류당하고 있을 때에,
그는 울부짖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42:1-2).
그는
다음과 같이 열렬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여전히 마음속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다시 무리들과 동행하며 또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기를 바라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가 갈 수 없다고 해도,
그는 정죄 받는다고는 느끼지 않으며
죄의 책임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화를 내신다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욕구를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토로할 수 있습니다.
“아, 내 영혼아, 하나님을 신뢰하라.
나는 나의 얼굴의 도움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신 분에게 오히려 감사하리로다.”
(시42:5참조).
흔히 의외의 죄(sins of surprise)라고
불리 우는 것들에 관해서 결정하는 일은 더욱 곤란합니다.
그것은 보통 때 인내하던 이가
갑자기 또는 격렬한 유혹을 받아
고귀한 율법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경우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성질의 위반에 관해서
일반적인 법칙을 고정시키기는 것은
용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의외의 죄 때문에
사람들이 정죄된다고도, 정죄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신자가 과오 속으로 밀려갔을 때에는
언제나 다소라도 정죄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다소라도 그의 의지의 동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 된 욕구,
혹은 발언,
혹은 행위가
다소 고의적인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소라도 언짢게 여기신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소라도 영혼에게 죄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큰 죄의 책임과 정죄를 가져올
약간의 의외의 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의외성이라는 그 사태가
어떤 고의적이고 부주의한 나태가 원인이었거나,
혹은 미연에 방지되었을지도 모를
혹은 그 유혹이 오기 전에 제거되었을지도 모를,
영혼의 잠이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시련과 위험이 가까워왔다는 경고를 받아도,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좀 더 자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잠언6:10).
이제 만일 이러한 사람이
나중에 엉겁결에 피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던
함정에 떨어진다면,
그가 모르고 떨어졌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위험을 예지하고 피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경우의 떨어짐은 비록 의외이었다 해도,
결과에 있어서는 고의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또는 자기 양심으로부터
다 함께 그 죄인을 유죄 판결로 들어낼 수밖에 없는
범죄인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예지하지 못했고
또 거의 예지할 수 없었던 돌연한 강습(强襲)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이 세상의 신으로부터
그리고 종종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의해 신자라 할지라도,
믿음이 약한 동안에는,
어쩌면
압도당하여서 의지의 협력이 없는데도
어떤 정도의 분노나 다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 일에
기울어집니다.
이제 이러한 경우에
질투의 하나님은 그가 어리석게 행동한 사실을
의심 없이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완전한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벗어난 것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요,
그 결과로
경신의 생각을 가지고 깊이 슬퍼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죄될 까닭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음을 그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동정하실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시 103:13)하십니다.
또 그의 마음은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의 슬픔과 수치의 복판에서도
그는 오히려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12:2).
Ⅳ
결론
이제 남아 있는 일은
앞에서 생각해온 본 것들로부터
몇 가지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1. 과거의 죄로 인하여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서
육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그들에게는
그들의 과거의 죄들로 인한 정죄가 없다”면
“믿음이 적은 자여, 당신은 왜 두려워합니까?”(마 8:26).
당신의 죄들이
과거에는 모래보다 더 많았었지만,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당신에게
그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누가 무엇을 가지고 고소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정죄한단 말입니까?(롬 8:33-34).
당신이 젊은 시절부터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을 받은 그때까지
범한 모든 죄가 겨와 같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사라져 버리고, 삼켜져 버려
이제는 기억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성령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요 3:6,8).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해결된 일로 인하여
근심하거나 두려워하려는 겁니까?
당신의
두려움을 던져버리십시오!
당신은
두려움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근신의 영”(딤후 1:7)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당신의 부르심을 아십시오.
당신의 구원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통하여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러나 나는 그의 피를 통하여 구속을 받은 이후로
다시 범죄 하였으며,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며
먼지와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욥 42:6)
라고 당신은 말하겠습니까?
당신이
스스로 자신을 혐오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혐오하도록 역사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나의 구원자가 살아 계신 것을 압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당신에게 다시금 해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지나간 모든 것을 다시금 취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정죄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진정으로 믿는 그 때,
그 때가 어느 때든지 간에,
그 시점 이전의 당신의 모든 죄들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갈5:1)
죄, 악한 욕망,
나쁜 기질이나 말이나 행위 등
부끄러운 대단한 속박만이 아니라
(이것은 이 세상의 지옥에서는 가장 슬퍼할 멍에이지만)
노예가 가진 것 같은 이 고민을 주는
공포와 죄책과 자기에 대한 유죄판결의
속박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2.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들은
모두 육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자신의 가슴에 의하여
정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가슴이 우리를 정죄한다면”(요일 3:20),
즉 우리 자신의 양심이
우리가 죄책이 있다고 증거 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도
우리가 죄책이 있다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 보다 더 크시며,
만사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2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과거에 의롭다함을 받았다.
나의 죄들은 과거에 용서되었다’라고
말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이
과거에 의롭다함을 받았는지를 모릅니다.
또한 당신 죄들이
과거에 용서되었는지 또는 용서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논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마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역사였는지
아니면 단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영혼을 속였던 것인지를
납득할만한 확실성을 가지고 알기도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극히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요일 3:8)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아비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이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아비가 하는 행동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 헛된 희망으로 우쭐거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혼에게 “평화, 평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실제로 당신에게는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렘 6:14; 8:11).
소리 내어 부르짖으십시오.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십시오(시 130:1).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실 런지도 모릅니다.
처음의 때와 같이
비참하고, 가난하고, 죄 많고, 가엾고, 앞을 못 보고,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오십시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패역함을 고치시고,
당신을 다시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으로 채우기까지는
당신의 영혼이 쉬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지키십시오.
3. 인내심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셋째로,
‘성령을 따라 걷는’ 그들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내적 죄(inward sin still remaining)에
굴복하지 않는 한,
이 남아있는 내적 죄로 인하여
정죄 받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
들러붙어 있는 죄(sin cleaving to all they do)로
인하여 정죄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불 경건(ungodliness)이
당신의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번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한탄하지 마십시오.
또한
교만이나 자기의지나 불신앙이
당신의 모든 말들과 행동들에 달라붙어 있다고 해서
한탄하지 마십시오.
당신 가슴의 모든 악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알고 계신 대로
당신 자신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고전 13:12)
당신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당신을 생각하지 않도록(롬 12:3) 해달라고
하나님께 바라십시오.
다음의 기도가
당신의 지속적인 기도가 되도록 하십시오.
내 영혼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보여 주소서,
타고난 죄의 심연을.
그 덮개를 열어서 보여 주소서
모든 불신앙과 그 안에서 넘실거리는 교만을.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실 때에,
그리고 당신의 가슴을 들추어내어 보여 주실 때,
당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를
하나님이 철저히 보여 주실 때,
당신이 당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당신의 방패가
갈가리 찢겨져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당신을 자신을 낮추십시오.
먼지 가운데서 겸손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무(無)로, 무 이하로, 공허한 것으로 보십시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당신은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여전히 계속 마음을 굳세게 하십시오.
“나, 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아버지 안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일2: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의 사랑은 내 죄보다도 크십니다.”(시103: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당신에게,
당신과 같은 죄인에게도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종류의
좋은 것이라도 주십니다.
당신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죄의 몸이
완전히 파멸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
깨끗하게 될 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깨끗한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일은 좋은 것이 아닙니까?
힘을 내십시오.
“당신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하게”(눅10:27)
됩니다.
“약속해 주신 이는 신실한 분이므로
또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히11:11)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인내심을 가지고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계속하는 일입니다.
쾌활한 평안을 누리며,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고요히 복종하며,
그러면서도 열성적인 기대를 가지고
만군의 주님의 열심히 이 일을 실행하실 것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4. 사단에게 속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넷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성령을 따라 걷는’그들이
연약성의 죄(sins of infirmity)로 인하여
정죄 받지 않는다면,
비고의적으로 결과 된 잘못들(involuntary failings)이나
그들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여하한 일들로 인하여
정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분의 보혈을 믿는 당신은,
이런 일들에 있어서
사단에게 “속지 않도록”(고후 2:11) 주의하십시오.
당신은
여전히 어리석고 약하며,
눈멀고 무지합니다.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약하고,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습니다.
당신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아직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연약함,
어리석음,
또는 당신이 어떻게 달리 할 수 없는
그로부터 나오는 여하한 결과로 하여금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자녀로서의 신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는
주님에 대한 당신의
화평이나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고의의 죄에 관하여 주는 규칙은
만일 그것이 약함과 연약성의 경우에로만 향해진다면
의심 없이 현명하고 안전합니다.
아!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은 넘어졌습니까?
그렇지만
조바심하거나, 당신의 약함을 슬퍼하거나 해서
거기에 누워 있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겸비하게 말하십시오.
“주여 만일 당신께서
당신의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나는 매 순간 이처럼 넘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십시오.
도약하고 걸어 나가십시오.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당신의 앞에 놓인 경주의 길을 견디며 달려가십시오.
5.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신자는 그 영혼이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당했다 해도 정죄될 까닭은 없기 때문에,
만일
믿는 당신이 그러한 방식으로 과실로 몰려갔다면
그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십시오.
그것은 귀중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마음을 쏟아 놓고
당신의 고민을 보이십시오.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확고히 안정시키시며
그 이상 당신이 넘어지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도록
힘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연약함을 동정하시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왜 당신은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고통을 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당신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보다 큰 사랑은 보다 큰 힘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즉시로 당신은 조금도 결함이 없는
성숙하고 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
당신의 전체 정신과 혼과 육체가 흠 없는 자로
서게 되도록 평화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고전1:8)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174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4)
Ⅰ
서론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람들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즉 더 이상 부패한 본성의 충동에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the Spirit)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정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로 부터의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로 거저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지우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내면으로부터의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은 것은 ‘세상의 영’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들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2:12).
그리고
이 성령께서 그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롬8:16)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더하여
저들의 양심이 육적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단순함(simplicity)과 경건한 성실(godly sincerity)로
저들이 이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구절은 너무도 자주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배우지 못해서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벧후 3:16)
(οἱ ἀμαϑεῖς καὶ ἀστῄρικτϙι)
즉
하나님에 대하여 배운 것이 없고,
그 결과로 경건을 따르는 진리에 있어서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딛 1:1)이
이 성경구절을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일들이(벧후 3:16)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분명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며,
그래서 육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그들이 누구인지,
둘째로
어떻게 해서 ‘이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인지를
몇몇 실용적인 추론들을 이끌어 냄으로
결론을 낼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1. 예수님과 연합된 자
먼저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롬8:1)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그들이 아닌가요?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자들,
자신의 의(義)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義)를
믿음으로 받는 자들이 아닌가요?
그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이 자들이
마땅히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살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성령 안에서 주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접목되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습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와 연합되어 있듯
그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머리로 깨달을 수도 없는 방식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2. 육을 따라 살지 않는 자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으며,
육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통상적인 용법에 있어서
육체는 부패한 본성(corrupt nature)을 의미합니다.
그런 뜻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갈5:9)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고,
그 조금 전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욕망)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
라고 했습니다.
이것,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더 쓰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절)”
이 구절(ἵνα μὴ ἅ ἂν ϑέλητε, ταῦτα ποιῆτε)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는 너희가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가
아닙니다.
이는 마치
육체가 성령을 이긴 것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번역은
사도 바울의 본래 글과 아무 상관이 없을뿐더러
그의 모든 주장을 가치 없게 만들고,
그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께 속한 자들은 육체의 정욕과 함께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육신의 모든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음행과 더러움”,
“부정과 호색”,
“우상숭배, 마술, 증오와 다툼”,
“시기, 분노, 당파심, 분열, 분파, 질투, 살인, 술 취함, 복수”
(갈5:19-21),
즉,
본성의 부패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이나 말이나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 쓴 뿌리를 느끼고 있지만,
그들은 그 쓴 뿌리를
지속적으로 발아래 밟을 수 있는 능력을
위로부터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 쓴 뿌리는
위로 올라와 그들을 괴롭히지 못합니다.(히12:15)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새로운 공격은
단지 그들에게 새로운 찬양의 기회를 주고,
다음과 같이 외치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줄 따름입니다.
“하나님 찬양 받으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3. 영을 따라 사는 자
이제 그들은
그 마음과 생활 양면에서 모두
영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성령에 의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그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사람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물이
솟아나는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그들은 모든 거룩한 욕망과
모든 하나님 같은 기질과
하늘에 속한 기질로 인도되며
마침내는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주님을 향한 성결이 됩니다.
(2) 언어의 성결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또한 그분에 의해 모든 대화가 성결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그들의 말은
언제나 은혜롭고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이 합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더러운 대화는 나오지 않고
오직 선하고 덕을 세우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기에 적합한 대화만 나옵니다.
(3) 행동의 변화
그리고 또 그들은
밤낮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만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의 모든 외적 행동에서
우리들에게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고
본을 남겨놓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힘씁니다.
그들의 이웃과의 모든 사귐에서
정의, 긍휼, 진실 안에서 걸으려고 합니다.
어떠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이들이 실제로 “성령을 따라 사는”(롬8:4)사람들입니다.
(4) 참된 열매를 소유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의 참된 열매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에서,
즉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 열매란
사랑과 기쁨과 평강과
오래 참음과 관용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랑할만하며,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들은
모든 일에서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의 복음을 빛나게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행3:15)
성령으로 행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Ⅲ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둘째로,
나는 어떻게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 자에게는
정죄 받는 일이 없는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1. 과거의 죄
먼저,
그리스도를 믿어 영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들의 과거의 죄 때문에 정죄 받지 않습니다.
과거의 죄 가운에
어떤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 때문에
그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죄는
마치 전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것들은
돌과 같이 깊은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것들을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한 속죄제로 그분의 아들을 주셨고,
그분의 보혈에 대한 믿음을 계기 삼아 하나님께서는
옛 죄들의 사면을 위해
그들에게 그분의 의(義)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죄의 어느 하나도 그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죄의 기억은
그러한 죄와 함께 소멸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 자신의 마음 안에 정죄함이 없습니다.
즉,
과거의 그 죄들로 인한 죄책감이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속에 이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혈을 믿음으로 얻는 유익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불확실성에 고문하듯이 고통스러워하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 속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양자의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므로
그들의 마음속은
하나님의 평화로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을
부단히 느끼고 있는 데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하나님의 긍휼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어두움이 그에게 닥쳐와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속량의 피에
자기가 참여되고 있다는
자기 안의 그 증거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그는 내적으로 정죄 받고 있으며,
그는 다시 마음속으로
죽음의 선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들 합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때에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빛, 즉 영혼 위에 빛나는 하나님의 빛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잃고 있는 한
그 사람은 믿음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심 없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는 사람도
믿음의 빛을 잃을는지도 모르는 것이요,
그것을 상실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시 정죄 받는 상태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지금 그 이름을 믿고 있는 자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한,
하나님도,
그들 자신들의 마음도
그들을 정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현재의 죄
다음으로,
그들은 현재의 그 어떠한 죄들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하는 것 때문에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부단한 증거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요일3:9).
하나님의 씨,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그 믿음이
그 사람 안에 여전히 있는 한은
그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그가 그 자신을 지키고 있는 한,
그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혀 범하지도 않는 죄들로 인하여
정죄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율법의 저주나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오직 그것을 파기하는 사람만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은
실제로 도적질하는 사람 이외에
아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은
이를 거룩히 지키지 않는 사람들만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부정하는 율법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사도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꼭 기억할만한 말씀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법대로 쓰기만 하면
좋은 것인 줄을 우리가 압니다.”
즉
다음의 사실을 알고 사용하면 좋습니다.
호키 디카이오 노모스 우 케이타이(ὅτι δικαίῳ νόμος οὐ κεῖται)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반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을 어긴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불경건한 자와
죄 있는 자와 거룩하지 않는 자와 속된 자를
재판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이것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보여 주는 것입니다.
3. 내적인 죄
셋째로,
그들은 내적인 죄 때문에 정죄 받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안에도
본성의 부패가 아직 머물러 있다는 사실,
그들 마음속에 교만과 허영,
분노와 탐욕과 악한 바램,
그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죄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일의 삶에서 경험되는 것이요,
절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즉 스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청중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갖게 된 사람이라고
즉시 그 앞에서 증언한 그 당시의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사도바울은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어서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고전3:1)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 아이(Baby Christ)라고 했으니,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낮은 수준의 신자였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얼마나 많은 죄가 그들 안에 남아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 육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 안에 육의 성품, 악한 본성을 느낄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을
날마다 더욱더 느낄지라도,
그들이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한,
마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한,
육신이 그들을 지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오히려 영을 따라 살도록
모든 죄, 교만, 분노, 욕망과 끊임없이 계속 싸우는 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정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진실한 복종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압니다.
4.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결함
그뿐만 아니라
넷째로 그들은 물론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죄가 단단히 붙어 있음을 끊임없이 확신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각에서나 말에서나 행위에서
완전한 율법을 성취하고 있지 못한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 하나님을 그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최선을 다하여
그 의무를 수행할 때에라도
다소간의 교만이나 고집이 가만히 스며들어 온다거나
뒤섞이거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그들이
큰 회중과 함께 모인다든지
마음의 모든 생각과 의향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은밀히 그들의 마음을 쏟아 붓는다든지 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사귐 속에서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방황한다든지
그들의 열정적 사랑이 죽어 있거나
활발하지 못하다는 것을
언제나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정죄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결함은
단지 그들에게 다음의 사실에 관한
보다 깊은 인식을 줄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귀에다 대고
그들을 위해서 변호해 주시는
샘솟는 보혈이 언제나 필요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대하여
영원히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저 대언자를 언제나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함은
그 믿어온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몰아내 버리는 일에서는 아주 거리가 먼 일이며,
오히려 그들이 매 순간 필요로 느끼고 있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하도록 몰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부족함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자는 간절한 갈망을 더욱 느끼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더욱 부지런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연약함의 죄
다섯째로,
그들은 소위 연약함의 죄(sins of infirmity) 때문에도
정죄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죄를 연약함과 결합시킴으로써
죄를 조금이라도 장려한다든지
혹은
죄를 어떤 정도로 가볍게 하려 한다고
생각되지 않게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부르는 편이
타당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처럼 불분명한
그리고 위험한 표현을 보유해야만 한다면
연약함의 죄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진실하다고 믿고 있는 사실을 말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될 경우와 같은,
고의 아닌 실패
혹은
아마도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고
의도했는데 알지 못하는 동안에,
혹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이웃을 해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충분하고
또 완전한 뜻에는 벗어나 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죄는 아니며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람의 양심에
적어도 죄책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연약함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가르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의 얼굴빛을 가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고 있는
그 전체적인 성격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6.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죄
끝으로
그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모든 사실 때문에
정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적인 본성의 것이든지
외적인 본성의 것이든지,
또는
그것이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든지
혹은 어떤 일을 행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주님의 성찬이 집행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 참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 그랬을까요?
당신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신은 정죄 받지 않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죄의 책임도 없습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원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가 가지지 않은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진 것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실로 신자는 어떤 때에는
그의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할 수 없어서
깊이 슬퍼하게 됩니다.
큰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일을 억류당하고 있을 때에,
그는 울부짖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42:1-2).
그는
다음과 같이 열렬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여전히 마음속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다시 무리들과 동행하며 또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기를 바라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가 갈 수 없다고 해도,
그는 정죄 받는다고는 느끼지 않으며
죄의 책임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화를 내신다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욕구를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토로할 수 있습니다.
“아, 내 영혼아, 하나님을 신뢰하라.
나는 나의 얼굴의 도움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신 분에게 오히려 감사하리로다.”
(시42:5참조).
흔히 의외의 죄(sins of surprise)라고
불리 우는 것들에 관해서 결정하는 일은 더욱 곤란합니다.
그것은 보통 때 인내하던 이가
갑자기 또는 격렬한 유혹을 받아
고귀한 율법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경우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성질의 위반에 관해서
일반적인 법칙을 고정시키기는 것은
용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의외의 죄 때문에
사람들이 정죄된다고도, 정죄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신자가 과오 속으로 밀려갔을 때에는
언제나 다소라도 정죄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다소라도 그의 의지의 동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 된 욕구,
혹은 발언,
혹은 행위가
다소 고의적인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소라도 언짢게 여기신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소라도 영혼에게 죄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큰 죄의 책임과 정죄를 가져올
약간의 의외의 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의외성이라는 그 사태가
어떤 고의적이고 부주의한 나태가 원인이었거나,
혹은 미연에 방지되었을지도 모를
혹은 그 유혹이 오기 전에 제거되었을지도 모를,
영혼의 잠이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시련과 위험이 가까워왔다는 경고를 받아도,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좀 더 자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잠언6:10).
이제 만일 이러한 사람이
나중에 엉겁결에 피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던
함정에 떨어진다면,
그가 모르고 떨어졌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위험을 예지하고 피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경우의 떨어짐은 비록 의외이었다 해도,
결과에 있어서는 고의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또는 자기 양심으로부터
다 함께 그 죄인을 유죄 판결로 들어낼 수밖에 없는
범죄인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예지하지 못했고
또 거의 예지할 수 없었던 돌연한 강습(强襲)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이 세상의 신으로부터
그리고 종종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의해 신자라 할지라도,
믿음이 약한 동안에는,
어쩌면
압도당하여서 의지의 협력이 없는데도
어떤 정도의 분노나 다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 일에
기울어집니다.
이제 이러한 경우에
질투의 하나님은 그가 어리석게 행동한 사실을
의심 없이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완전한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벗어난 것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요,
그 결과로
경신의 생각을 가지고 깊이 슬퍼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죄될 까닭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음을 그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동정하실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시 103:13)하십니다.
또 그의 마음은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의 슬픔과 수치의 복판에서도
그는 오히려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12:2).
Ⅳ
결론
이제 남아 있는 일은
앞에서 생각해온 본 것들로부터
몇 가지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1. 과거의 죄로 인하여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서
육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그들에게는
그들의 과거의 죄들로 인한 정죄가 없다”면
“믿음이 적은 자여, 당신은 왜 두려워합니까?”(마 8:26).
당신의 죄들이
과거에는 모래보다 더 많았었지만,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당신에게
그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누가 무엇을 가지고 고소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정죄한단 말입니까?(롬 8:33-34).
당신이 젊은 시절부터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을 받은 그때까지
범한 모든 죄가 겨와 같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사라져 버리고, 삼켜져 버려
이제는 기억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성령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요 3:6,8).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해결된 일로 인하여
근심하거나 두려워하려는 겁니까?
당신의
두려움을 던져버리십시오!
당신은
두려움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근신의 영”(딤후 1:7)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당신의 부르심을 아십시오.
당신의 구원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통하여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러나 나는 그의 피를 통하여 구속을 받은 이후로
다시 범죄 하였으며,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며
먼지와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욥 42:6)
라고 당신은 말하겠습니까?
당신이
스스로 자신을 혐오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혐오하도록 역사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나의 구원자가 살아 계신 것을 압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당신에게 다시금 해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지나간 모든 것을 다시금 취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정죄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진정으로 믿는 그 때,
그 때가 어느 때든지 간에,
그 시점 이전의 당신의 모든 죄들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갈5:1)
죄, 악한 욕망,
나쁜 기질이나 말이나 행위 등
부끄러운 대단한 속박만이 아니라
(이것은 이 세상의 지옥에서는 가장 슬퍼할 멍에이지만)
노예가 가진 것 같은 이 고민을 주는
공포와 죄책과 자기에 대한 유죄판결의
속박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2.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들은
모두 육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자신의 가슴에 의하여
정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가슴이 우리를 정죄한다면”(요일 3:20),
즉 우리 자신의 양심이
우리가 죄책이 있다고 증거 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도
우리가 죄책이 있다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 보다 더 크시며,
만사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2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과거에 의롭다함을 받았다.
나의 죄들은 과거에 용서되었다’라고
말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이
과거에 의롭다함을 받았는지를 모릅니다.
또한 당신 죄들이
과거에 용서되었는지 또는 용서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논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마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역사였는지
아니면 단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영혼을 속였던 것인지를
납득할만한 확실성을 가지고 알기도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극히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요일 3:8)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아비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이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아비가 하는 행동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 헛된 희망으로 우쭐거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혼에게 “평화, 평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실제로 당신에게는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렘 6:14; 8:11).
소리 내어 부르짖으십시오.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십시오(시 130:1).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실 런지도 모릅니다.
처음의 때와 같이
비참하고, 가난하고, 죄 많고, 가엾고, 앞을 못 보고,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오십시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패역함을 고치시고,
당신을 다시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으로 채우기까지는
당신의 영혼이 쉬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지키십시오.
3. 인내심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셋째로,
‘성령을 따라 걷는’ 그들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내적 죄(inward sin still remaining)에
굴복하지 않는 한,
이 남아있는 내적 죄로 인하여
정죄 받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
들러붙어 있는 죄(sin cleaving to all they do)로
인하여 정죄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불 경건(ungodliness)이
당신의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번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한탄하지 마십시오.
또한
교만이나 자기의지나 불신앙이
당신의 모든 말들과 행동들에 달라붙어 있다고 해서
한탄하지 마십시오.
당신 가슴의 모든 악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알고 계신 대로
당신 자신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고전 13:12)
당신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당신을 생각하지 않도록(롬 12:3) 해달라고
하나님께 바라십시오.
다음의 기도가
당신의 지속적인 기도가 되도록 하십시오.
내 영혼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보여 주소서,
타고난 죄의 심연을.
그 덮개를 열어서 보여 주소서
모든 불신앙과 그 안에서 넘실거리는 교만을.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실 때에,
그리고 당신의 가슴을 들추어내어 보여 주실 때,
당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를
하나님이 철저히 보여 주실 때,
당신이 당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당신의 방패가
갈가리 찢겨져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당신을 자신을 낮추십시오.
먼지 가운데서 겸손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무(無)로, 무 이하로, 공허한 것으로 보십시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당신은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여전히 계속 마음을 굳세게 하십시오.
“나, 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아버지 안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일2: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의 사랑은 내 죄보다도 크십니다.”(시103: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당신에게,
당신과 같은 죄인에게도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종류의
좋은 것이라도 주십니다.
당신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죄의 몸이
완전히 파멸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
깨끗하게 될 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깨끗한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일은 좋은 것이 아닙니까?
힘을 내십시오.
“당신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하게”(눅10:27)
됩니다.
“약속해 주신 이는 신실한 분이므로
또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히11:11)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인내심을 가지고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계속하는 일입니다.
쾌활한 평안을 누리며,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고요히 복종하며,
그러면서도 열성적인 기대를 가지고
만군의 주님의 열심히 이 일을 실행하실 것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4. 사단에게 속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넷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성령을 따라 걷는’그들이
연약성의 죄(sins of infirmity)로 인하여
정죄 받지 않는다면,
비고의적으로 결과 된 잘못들(involuntary failings)이나
그들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여하한 일들로 인하여
정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분의 보혈을 믿는 당신은,
이런 일들에 있어서
사단에게 “속지 않도록”(고후 2:11) 주의하십시오.
당신은
여전히 어리석고 약하며,
눈멀고 무지합니다.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약하고,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습니다.
당신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아직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연약함,
어리석음,
또는 당신이 어떻게 달리 할 수 없는
그로부터 나오는 여하한 결과로 하여금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자녀로서의 신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는
주님에 대한 당신의
화평이나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고의의 죄에 관하여 주는 규칙은
만일 그것이 약함과 연약성의 경우에로만 향해진다면
의심 없이 현명하고 안전합니다.
아!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은 넘어졌습니까?
그렇지만
조바심하거나, 당신의 약함을 슬퍼하거나 해서
거기에 누워 있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겸비하게 말하십시오.
“주여 만일 당신께서
당신의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나는 매 순간 이처럼 넘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십시오.
도약하고 걸어 나가십시오.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당신의 앞에 놓인 경주의 길을 견디며 달려가십시오.
5.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신자는 그 영혼이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당했다 해도 정죄될 까닭은 없기 때문에,
만일
믿는 당신이 그러한 방식으로 과실로 몰려갔다면
그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십시오.
그것은 귀중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마음을 쏟아 놓고
당신의 고민을 보이십시오.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확고히 안정시키시며
그 이상 당신이 넘어지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도록
힘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연약함을 동정하시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왜 당신은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고통을 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당신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보다 큰 사랑은 보다 큰 힘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즉시로 당신은 조금도 결함이 없는
성숙하고 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
당신의 전체 정신과 혼과 육체가 흠 없는 자로
서게 되도록 평화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고전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