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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 선한 청지기 (1758)

본문

선한 청지기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눅 16:2)




서론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피조물이 그 창조자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인간을 죄인, 타락한 피조물로 생각할 때에는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빚진 자(debtor)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가끔 종(servant)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종(servant)으로서의 관계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겸비의 상태에 있을 때
이 명칭이 그에게 주어졌던 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인간들과 같은 모양이 되셨습니다.’[빌 2:7].

그러나
청지기(steward)라는 특징이야말로
오늘날의 인간의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인간이 빚진 자,
또는 종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종으로 불리 울 때
그‘종’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이며 특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하나의 특정한 종류의 ‘종’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청지기는 종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그러한 특정한 종류의 종인 것입니다.

이 청지기라는 명칭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종이며,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종류의 섬김을 기대하시는지를 특정함으로써,

현재 세상 안에서의
인간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점을 철저하게 살펴봄으로써
청지기의 직분을 잘 감당한다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채무자(a debtor)는 받은 것을 돌려줘야할
의무를 지고 있지만
돌려줄 때가 오기까지는 그는 자기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그것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청지기(a steward)는 그렇지 않습니다.

청지기는
수중에 맡겨져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용해서는 안 되고
주인의 생각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는 주인의 뜻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어떤 것도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것들 중의 아무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니요,
다만 다른 이에 의하여 맡겨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모든 것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처분해야 한다는
분명한 조건으로 맡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중에 맡기신 것을
우리들이 좋아하는 대로 마음대로 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늘과 땅의 소유자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
이외에는 우리가 가진 것을 처분할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것들은 모두가 ἁλλὀτρια,
즉,‘다른 사람에게 속해있는’것입니다.

또 우리가 순례하고 있는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정당하게‘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일컬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라에 가기까지 Τἁ ἴδια,
즉,‘우리 자신의 것들’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들만이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시적인 것들은 단지 다른 이에 의하여,
모든 것의 처리자이시고 주인 되신 그분에 의하여
맡겨져 있는데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맡기시되
그것들을 우리 주인의 소유물로만 사용할 것이요,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개개의 지시들을 따라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명백한 조건 하에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조건 밑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 육체, 재산,
그리고 우리가 받은 다른 여러 가지 재능(talents)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 중요한 진리를
우리 마음에 명심하기 위해서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1. 영혼(soul)을 맡기심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soul)을 맡기셨습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만들어진 불멸하는 영(spirit)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과 더불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영혼의 모든 능력들과 기능들을 맡기셨습니다.

이 능력들과 기능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해력, 상상력, 기억력,
의지와 이 의지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이 의지에 밀접히 의존되어 있는 일련의 정서들,

현재의 선과 악에 관련하여 갖게 되는
사랑과 증오, 즐거움과 슬픔,
그리고 앞으로 올 것에 관련하여 갖게 되는 바람과
싫어함, 희망함과 두려워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평화가 너희의 가슴(heart)과 마음(mind)을
  지켜주시길 원하노라’(빌4:7)라고 말하면서,

가슴과 마음이라는 두 단어에 이 모든 것 들을
다 담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매우 넓은 의미로 이해하여
능동적이거나 피동적이거나 정신의 모든 지각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확실히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의 단순한 청지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힘과 기능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자신의 뜻을 따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지시를 따라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력, 상상력, 기억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뜻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고
우리의 감정은 모조리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규정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
모든 사항에서 우리가 누구를 섬겨야 할 것인가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정해진 규정에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원하고 기피하며, 바라고 두려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 마음대로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 마음의 하나하나의 신중한 동기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크신 주께 책임을 맡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몸(bodies)을 맡기심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bodies)을
(‘놀랍고도 두려울 정도로’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를)
그 모든 힘과 지체와 함께 맡겨주셨습니다.

  (1) 감각기관

하나님은 감각(sense)의 모든 기관,

곧, 보고 듣고 하는 기관과 그 밖의 기관을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용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어느 것도
어느 기간 동안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로
우리에게 대여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바로 그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사용해선 안 됩니다.

  (2) 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의 능력(talent of speech)이라는
그 가장 우수한 재능을 부여해 주신 것도
동일한 조건에서입니다.

옛날의 저작자도 말합니다.

 “주님이여, 당신은 나에게 혀를 주셨나이다.   
  이는 내가 이것을 가지고
  당신을 찬양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Augustine, Confessions, V.i)
 
그것은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사용되기 위해
모든 인간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혀는 자신의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은혜를 잊은 자, 우스운 자가 또 달리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만들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자가 아닌 한,
그러한 웃을만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자는 주시요 우리 자신이 아니다”(시100:3)
                               
이 점에서나 다른 모든 점에서나
하나님이 역시 우리를 지배하시는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 혀의 말로써 우리가 하나님에게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3) 손, 발, 지체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손(hands)과 발(feet)
그리고 우리 몸의 모든 지체들(members)의 사용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들은
아버지에 의하여 정해진 때가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뢰하셔서 맡기신 많은 달란트들입니다.

그 때가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도 좋지만
그것은 청지기로서 사용하는 것이지 소유자로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체를 죄에 내어 주어 불의의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온 몸이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게 하는”(롬6:13)
것을 목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3. 재물(worldly goods)을 맡기심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재물(worldly goods)을
분배해 주시고 그것을 맡기셨습니다.

먹을 음식, 입을 의복, 머리를 눕힐 장소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생활의 필수품만 아니라
편의를 위한 것들도 맡기셨습니다.

그 중에도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한 저 귀중한 달란트인
돈(money)을 우리가 관리하도록 맡기셨습니다.

돈은 실로 말할 수 없이 귀중합니다.
다만 우리가 돈에 대해서 현명하고 충실한 청지기요,
또 우리의 복되신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그 목적을 위하여 모든 것을 사용한다면 말입니다.

4. 은사(talent)를 맡기심

넷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항목의 어느 것에도 들지 않는
얼마간의 달란트(talent), 은사를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신체의 힘(strength), 건강(health),
상냥한 인품(person), 상냥하게 응대하는 태도(address),

배우고 지식을 얻는 능력(learning and knowledge)과 
여러 가지 교육(education)의 혜택을 받아들이는 능력,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고(love)
인정해 주는 것(esteem)을 바라서
그들에게 영향(influence)을 끼치거나,
또는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써,
또는 그들을 해칠 수 있는 능력으로써,

삶의 환경들 안에서
그들을 돕거나 방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이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시간(time)이라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은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더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위의 모든 것이 이것에 의존되어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그 모든 것들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 버리는 그것,

즉 하나님의 은혜(grace),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열납 하실 만한 모든 것을
홀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은사입니다.




더 이상 청지기일 수 없다.


매우 많은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종류의 능력들(goods) 가운데 큰 부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관리 아래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우리의 것도 아니며
사실상 긴 시간 동안 맡겨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위에 사는 짧은 기간 동안만
그것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만,
이 덧없는 호흡이 콧구멍을 통하고 있는 동안만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제부터 네게 관리인 직분을 맡길 수 없다”(눅16:2)
라고 말씀하실 그 때가
우리 눈앞에 신속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1. 사명이 끝남

  (1) 재물에 대하여

몸이
“본래 먼지였던 바 그 먼지로 돌아가고,
  영이 그 영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전12:7)
그 순간에 우리는 청지기의 직분을 더 이상
지닐 수 없게 됩니다.

그 전에 우리에게 맡겨졌던 것들의 일부는 그 때
끝나게 됩니다.

그것들은 적어도‘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다시는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부분도 더 이상
그 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용되거나 개선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전에 우리에게 맡겨졌던 것의 역할은
적어도 우리에게 관해서는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이 끝난 이후에
음식물이나 의복이나 주택이나 이 세상의 재물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죽은 자의 음식은 땅의 흙이요,
그들은 단지 버러지와 부패를 입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모든 육체를 위하여 마련된 집에서 거합니다.
그들의 나라는 더 이상 그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졌던
이 세상의 재산은 모두 다른 이의 손에 넘겨져서
그들에게는
“해 아래에 행하는 모든 일에 다시는 분복이 없습니다.”                                                (전9:6)

  (2) 육체에 대하여

사정은 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이 기계의 청지기는 아니게 됩니다.

그 때에
몸은 부패와 치욕 속에 흩어집니다.
몸을 구성하고 있었던 모든 부분과 요소는
진흙 속에 뉘어져 썩어집니다.

손은 이미 움직일 힘을 잃고 발은 그 기능을 잃었습니다.
살과 근육과 뼈도 모두 흔한 흙으로 해체되기를
재촉당하는 것입니다.

  (3) 은사에 대하여

또 여기 여러 가지 성질의 달란트도 끝납니다.

즉,
우리의 체력, 건강, 아름다움, 웅변, 말솜씨,
남을 즐겁게 하거나 설복시키거나 납득시키거나 하는
능력이 끝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우리가 일찍 향유하였던 모든 명예,
우리 손에 쥐어졌던 모든 권력,

남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품고 있던
사랑 혹은 존경에 의하여
우리가 일찍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가졌던
모든 영향력이 끝납니다.

우리의 사랑, 미움, 욕망도 사라집니다.
아무도 우리가 일찍이 그들에게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던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자기들을 도우지도 해치지도 못하는 자로 봅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9:4)
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재능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 몸이 흙으로 돌아 갈 때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개선되는 것을 멈추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언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하는 재능(speech)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기관들이 파괴될 때
완전히 끝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확실히
혀는 이미 아무 진동도 공중에 일으키지 못하며
또 귀도 이러한 진동을 공통의 감각기관에
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몸을 떠난 영에게서 나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이 상상하는 그 낮고 날카로운 소리(sonus exilis)조차도 우리는 그 실제적인 존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단지 상상력의 비약일 뿐입니다.

사실 몸을 떠난 영들도
서로의 마음을 교통하는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혈과 육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이 땅의 주민들이
그 방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언어(speech)”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간주 될 때에는
이미 이 달란트(우리의 언어)의 청지기는 될 수 없습니다.

2) 감각들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모든 기관이 소멸된 때에
우리의 감각들(senses)이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촉각, 후각, 미각과 같은 비교적 낮은 종류의 감각이
없어지는 것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몸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전적으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로 몸의 보전을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시력(some kind of sight)은 죽음으로 인하여 눈이 닫혀 진다 해도 여전히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영혼 안에는 지금의‘청각’(hearing)과 동일한
무엇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뿐 아니라
혼이 몸에서 떠난 상태에로 단순히 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현재보다도 훨씬 뛰어난 정도로,

한층 더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는
혼은 그 흙이 되는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이미
“흐린 곳에서의 죽어가고 있는 불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때에는
혼은 이미 “눈과 귀라는 창을 통해서 보는 것”
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때,

(이상의 두 인용문은 Sir John Davie 의 Nosec Teipsum에서 인용)

우리가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혼 자체가 모두 눈이요, 귀요, 감각 그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의 가능성,
눈을 사용하지 않고 보며 귀를 사용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의 분명한 증거를,

아니 그뿐 아니라 그 사실의 전조(前兆)를
끊임없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혼은 눈이 전혀 쓸모가 없을 때에,
즉 꿈속에서 매우 분명한 방식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혼은 귀로부터의 아무 도움이 없이도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사실이 어떠할 것인가 하는 명확한 사실은

몸이 무덤 속에 누워있게 될 때에는
우리의 감각도 우리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방식으로는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 지식, 배움

우리가 교육에 의하여 얻은 지식이나 학식이
그 때에 얼마만큼 남아 있을지는
우리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9:10)

그러나
이러한 말이 절대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떠난 후에는
지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로부터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의문은 반대쪽에서 일어납니다.
즉, 그 때까지 진정한 지식이라는 것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음의 인용에 나타나 있는 것은 단순한 시적 상상이 아니요
분명한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 그림자들은
  죽음의 잠 속에서 우리가 만드는 공허한 꿈에 불과하다
    (Abrahan Cowley의 Life에서 인용)

물론,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자진해서 계시하신 사항은
유일한 예외이기는 합니다.

체험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말합니다.

어느 만큼의 근면성을 가지고
약 50년 동안 진리를 추구해온 뒤에,
오늘날 나는 성경에서 배운 사항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어느 것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나의 구원을 기꺼이
성경에 근거시키겠다고 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그렇게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단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의 말에서
“음부에는” 불우한 영에게 조금도 유용한
“지식도 지혜도 없다”(전9:10)는 정도의 사실은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음부에는 그가 일찍이 맡았던 여러 가지 달란트를
그때가 되어 활용하려고 생각해도
그것을 위한“계획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냐 불행이냐를 결정하는
우리의 시련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우리의 날, 인간의 날은 끝났습니다.
‘구원의 날’(고후6:2,사49:8)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오직 광대하고 불변하는 영원의 길잡이가 되는
“주의 날”(살후5:2)이 지금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2. 여전히 남아있는 것
 
  (1) 영혼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의 영혼은 부패하지 않으며 불멸하며
“천사들보다 조금 낮은”(히2:7) 성질의 것입니다.

(이 성구를 우리의 타락 이전의 본성의 의미로
 이해한다 해도 같은 것이 됩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은 몸이 썩어 흙이 될 때에도
그 기능을 모두 갖춘 채로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력(memory)과 이해력(understanding)은
육체의 소멸로써 소멸되거나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상상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다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현재 혼과 부패하는 육체와의 결합을 위하여
당연히 생겨나고 있는 결함으로부터
그 때에는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2) 기억력

혼과 육체가 분리한 때로부터는
우리의 기억은 아무것도 떨어져 나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기억력은 과거에 기억에 맡겨졌던
모든 것을 믿을만하게 우리의 눈에 보이듯이
다 펼쳐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확실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성경에서 “잊음의 땅”(시88:12)으로 불리 워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옛 번역으로는
그 이상 강한 표현으로“모든 것이 잊혀 진 나라”로
호칭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잊혀 진다고 하지만
대체 누구에 의해서 입니까?

그것은
그 땅의 주민들에 의하여 잊혀 진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사는 주민들에 의하여 잊혀 진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잊음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땅의 주민들에 관한 말입니다.

그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들에 의하여 너무도 자주
잊히고는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이탈된 영들은 그 모든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 영들이 이 땅의 장막을 벗어버리는 그 시간부터
그 영들이 무엇을 잊는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3) 이해력

마찬가지로 의심할 바 없이
이해력(understanding)도 지금은 분리할 수 없는
그 결함들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서 "Humanum est erraeet nescire"
즉‘무지와 오류는 인간성에 부착된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의심할 수 없는 격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장 전체는
단지 살아있는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며,
“부패하는 육체가 혼을 압박하고 있는”(지혜서9:15) 동안
이상으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무지(ignorance)는 확실히 모든 유일한 이해력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항을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달리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러나 오류(mistake)는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가 버려질 때 이‘오류’또한 영구히 버려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근자에 하나의 의견을 발표한
한 독창적 인물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인물에 의하면
육체를 떠난 영은 단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요
기억력도 이해력도 사고도 식별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까지도 없습니다.
그 영들은 죽음에서 부활까지 죽음의 잠 속에 있습니다.
실로 Consanguineus lethi sopor(죽음과 흡사한 잠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잠을 우리는 그것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죽음에 가까운 친척”(이 발견을 한 사람처럼)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똑똑한 사람들은
그런 죽음과도 같은 잠 속에서 이상한 꿈을 꾸며
그 꿈을 때때로 현실로 착각한다고 밖에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4) 모든 감정들

그러나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육체의 사멸에도 불구하고
혼이 그 이해력과 기억력을 보유하는 것처럼
틀림없이 의지도 모든 감정을 포함하여
그 충분한 활동력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나 분노, 희망이나 욕망이 소멸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뒤에 남겨둔 사람들에게만 관계됩니다.

뒤에 남기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우리의 애정과 증오, 욕망이나 혐오의 대상이었든지
어쨌든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있어서
이런 것들 중의 하나라도 소멸해 버린다고
우리가 믿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더욱이 혼이 살과 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던 때보다도 의지와 감정은
훨씬 큰 힘으로 활동할 것입니다.

3. 청지기로서의 자격상실

확실히
이 모두 우리의 지식과 지각, 기억력과 이해력,
또 우리의 의지, 사랑, 미움, 그리고 모든 감정은
육체가 버려진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러나
육체가 버려진 후에는 다음의 점에서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이미 그것들의 청지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만 우리의 청지기의 임무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자격에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충실하고 현명한 청지기일 수 있기 위하여
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은혜까지도
이제는 더 이상 그 목적을 위하여 맡겨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청지기 직분의 날들은 끝난 것입니다.






회계보고


이제 더 이상 청지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은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회계보고를 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하기를
그것은 죽은 후에 즉시,
우리가 영들의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로마교회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옹호하고,
그 위에 이것을 신조의 한 항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정도까지는
인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혼이 육체를 벗어나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서는 그 순간에
그가 영원히 받을 몫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리는 판단에 있어서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받을 몫이
영원한 즐거움인지, 영원한 고문인지를
명백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그 때에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믿을 이유를
조금도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어디에도 그러한 것(죽자마자 심판받는 것)을
조금이라도 긍정하는 것 같은 구절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
이를 입증할 목적으로 이야기 되어 온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의 사정(죽자마자 심판받는 것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즉,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히9:27)
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이 반대쪽 사정(죽자마자 심판받는 것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한 번”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만이 아니라 심판에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구절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공정한 추론은 두 번의 심판,

즉, 죽음 직후에
죽는 자 개인에게 해당되는 심판과 일반적인 심판,
이렇게 두 번의 심판이 있는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단 한 번 죽는 것과 동시에
단 한 번 심판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 이후에 즉시 한 번 심판을 받고
일반적인 부활이 있은 후에
다시 심판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중에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오는”
                                        (마16:27)
그 때에만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신앙의 전적인, 유일한 기준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때에 하나의 심판이 있고
세상의 종말에 또 한 번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 상상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회계보고를 해야만 하는 시기는
“하늘에서 크고 흰 보좌가 내려오고 거기 앉아있는 분이
  계시며 땅과 하늘도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을 수 없게 될”(계20:11) 그 때입니다.

그 때에는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그 보좌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책이 펴집니다.”(계20:12).

즉,
성경책이 맡겨졌던 사람들에게는
성경책이 펼쳐질 것이고,
전 인류를 위해서는 양심의 책이 펼쳐집니다.

(또 하나의 성경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세상의 창세로부터 쭉 기록되어 온
“기념책”(말3:16)도 그때 펼쳐져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
즉 모든 인류 앞에,
무수한 거룩한 천사의 무리들 앞에,

또 모든 사람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당신은 어떤 은신처도 덮개도 없이
아무 위장의 가능성도 없이 출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출두한 이유는
당신이 주의 재산을 사용한 방식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1. 영혼을 어떻게 썼는가?

그 때에
모든 사람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네 혼을 어떻게 썼는가?
여러 가지 힘과 기능, 이해력과 상상력과 기억력과 의지,
감정을 부여받은 불사의 영을 나는 네게 맡겼다.

그 위에 나는 네게 이 모든 것들이 어떤 모양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충분한 그리고 명확한
지시를 주었다.

너는 자신의 이해력을 할 수 있는 대로 이러한 지시를
따라 사용했는가?
즉, 네 자신과 나를 알기 위하여 사용했는가?

나의 본질, 나의 속성, 창조나 섭리나 은혜에 관한
나의 업적을 알려고 했는가?

너는 나의 말을 친숙하게 알기 위하여 자신의
이해력을 사용했는가?

나의 말에 대한 네 지식을 더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사용했는가?

나의 말에 대하여 밤낮으로 심사숙고하였는가?

너는 자신의 기억력을 나의 뜻을 따라서 사용했는가?

나의 영광이나 너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사람의 이익에 공헌하는 지식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취득하여 그것을 저축하였는가?

너는 네 기억 속에 가치가 없는 사항은 말고
네가 내 말에서 배운 모든 교훈, 네가 나의 지혜, 진리,
능력, 긍휼에 관해서 얻은 모든 체험을 축적했는가?

네 상상력은 쓸데없는 영상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요,
하물며‘어리석고도 해로운 여러 가지 욕심’(딤전 6:9)을
육성하는 영상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요,
네 혼을 유익하게 하며 너를 환기시켜
지혜와 깨끗함을 추구케 하는 사항을
모두 하나하나 네게 그려내기 위해 사용됐는가?
 
너는 자신의 의지에 관하여 나의 지시를 따랐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내게 바쳐졌는가?

네 의지는 나의 의지 가운데 삼켜져서 결코 나의 의지에
거슬림이 없이 늘 그것과 평행하고 있는 정도였는가?

네 감정은 내가 나의 말 속에서 지정하고 있는 방식으로
배치되고 통제되어 있는가?

너는 마음을 내게 주었는가?

너는 이 세상도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않았는가?

내가 네 사랑의 대상이었는가?

네 욕망은 모두 내게로 또는 내 이름을 기념하는 쪽으로
향해져 있었는가?

나는 네 마음의 기쁨, 네 혼의 즐거움, 천만가지 중의
으뜸이었는가?

너는 내 영을 슬프게 하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슬퍼하지 않았는가?

너는 죄 이외의 것을 아무것도 무서워하거나 미워하거나
하지 않았는가?

네 감정의 흐름 전체는 원래의 근원인 큰 바다에로 흘러
들어갔는가?
 
네 생각은 나의 뜻을 따라 사용되었는가?

땅 끝까지 미친다든지
우행이나 죄를 생각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모든 참된 것과 모든 옳은 것’(빌4:8)을 생각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는가?

나의 영광 그리고 ‘사람들의 평화와 선의’(눅2:14)로
인도하도록 하는 모든 사항을 생각하기 위해
사용되었는가?

2. 몸을 어떻게 썼는가?

그리고는 주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네게 맡긴 육체를 너는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나는 네게 나를 찬미하기 위한 것으로 혀를 주었다.
너는 그것을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하였는가?

너는 그것을 욕을 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무자비한 말이나 무익한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선을 위해, 즉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하거나
유용한 방식으로 사용하였는가?

혀는 언제나 직접적으로 간접으로나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게’(엡4:29)하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나는 네게 다른 지각과 함께
시력과 청력이라는, 지식에의 위대한 길을 주었다.
그것들은 네게 주어진 우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는가?

물론
그 목적이란 너를 더욱 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의
가르침으로 인도해 주는 일이다.

나는 너를 위해 준비된 일을 네가 실행할 수 있도록
손과 발과 여러 기관을 주었다.

그것들은 ‘육신의 생각’(롬8:6),
네 악한 본성의 소원대로 행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이행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너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의 뜻’(요4:34)을 이행하고
오직 너 자신의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었는가?

너는 자신의 기관을 모두 불의의 무기로
죄에 넘겨주는 일을 하지 않고
나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통하여 그것들을
‘의의 병기로’(롬 6:13) 나에게만 바쳐 주었는가?

3. 재물을 어떻게 썼는가?

만물의 주는 다음에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네 수중에 맡긴 이 세상의 소유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너는 자신의 식물을 거기서 네 행복을 추구하거나
걸기 위해서가 아니요, 혼에 합당한 도구로서의 육체를
건강하고 힘차게 활력에 찬 몸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였는가?

너는 의상을 교만이나 허영심을 찬 몸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였는가?
 
너는 의상을
교만이나 허영심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더구나 다른 사람들을 죄에 유혹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자신을 기후의 재해로부터 적절하게 또는
단정하게 지키기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너는 자신의 주택 그리고 그 밖의 모든 편리한 것들을
나의 영광만을 목표로 하여 만들고 사용하였는가?

그 모든 점에서 너 자신의 명예가 아니요,
나의 명예를 추구하며 너 자신이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목적하고 있었는가?

되풀이가 되지만
너는 저 포괄적인 안목의 정욕이나 생활의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익한 비용으로 낭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내게로 돌려져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받도록 정한 것이다.
 
너는 자신을 가난한 사람의 수호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나는 네 수중에 네 재산의 일부를 맡겼는데
그 목적은 그들 가난한 사람들의 필수품이 거기에서
공급되기 위함이었다.

네게는 첫째로 공급 받는다는 권리를,
또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의 축복을 맡긴 것이다.

그것을 따라서 너는 인류 전체에게 은혜를 베풀었는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위로하며,
나그네 된 자를 돌보고, 고통 하는 자를
그 여러 필요에 따라 구원했는가?

너는 소경에 대해서는 눈,
불구자에 대해서는 발,
아버지를 잃은 자에 대해서는 아버지,
과부에 대해서는 남편이었는가?

또 너는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는 수단으로서
모든 자비의 외적 활동을 증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가?

4. 은사를 어떻게 썼는가?

당신의 주는 다시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네게 대여해 준
혼합된 성질의 달란트에 관하여 현명하고 충실한
청지기였는가?

너는 자신의 건강과 능력을
어리석은 행동이나 죄, 탐닉하고 있는 동안
소멸해 버리는 쾌락을 위해 쓰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마음을 쓰는(롬13:14)  일에 쓰지 않고 네게서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저 보다
좋은 부분을 간절히 추구하기 위해 사용했는가?

너는 자신의 인품이나 태도에서 바람직한 것,
네가 교육에서 얻은 이익,
네게 맡겨진 지식의 분량,

사물이나 인간에 관한 지식을
이 세상의 미덕을 촉진 시키고 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깃,
사람들이 마음에 품게 된 네게 대한 사랑이나 존경으로써
네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모두 사람들의
지혜와 거룩함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사용했는가?

너는 시간이라는 비할 데 없는 귀한 달란트를
각 순간이 가진 가치를 바르게 계산하고 그 모든 순간들이
영원 속에서 계산된다는 것을 앎으로써 세심한 신중성을
가지고 사용하였는가?

더구나 너는 네게 선행하며 너와 동반하며
네 뒤를 따르는 내 은혜의 좋은 청지기였는가?

너는 내 영의 모든 감화를,
즉 모든 좋은 욕망, 모든 정도의 빛,
하나님의 모든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비난을
바르게 간파하고 조심스럽게 활용하였는가?
 
너는‘아들이 되게 하는 영’이전에 주어지는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영’(롬8:15)으로서
어떻게 이익을 얻었는가?

네가 마음속으로‘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게 되었을 때에
내가 너를 자유케 한 그 빛나는 자유 안에
너는 계속 굳게 섰는가?

너는 그 때 이후로 네 영혼과 육체, 모든 생각,
모든 언행을 네 육체와 영혼으로 나를 찬미하기 위하여
하나의 사랑의 불꽃으로 거룩한 희생으로 바쳤는가?

그리했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25:21)
그러면
충성된 청지기와 불충실한 청지기에 대하여
나중에 무엇이 남을 것입니까?

바른 재판관에 의하여 언도된
저 판결의 집행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영원한 세기에 걸쳐서
변화하는 일이 없는 상태 속에 고착시켜 버릴 것입니다.

당신이
영원에 걸쳐서 자신의 행위에 따라
갚음을 받는다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결론


1. 삶의 중요성

첫째로,
이 짧고 불확실한 일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부분이
모든 언사, 모든 개념을 초월하여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이 미미한 것들도 진지한 관심이 요구된다.
    아주 작다 해도 그것은 황금의 모래알이니

(이 시는 Gambold 의 Upon List'ning to the Vibrations of a Clock에서의 인용, 웨슬리는 이것을 Maral and Sacred Poems, Vol, ⅲ p.195에 인용 인쇄했다.)

이러한 모래 한 알까지도
헛되이 흘리지 않고 하나님의 숨결이
인간의 콧구멍에 있는 한,

그것들은 모두 더욱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활용하는 일은
모든 인간의 자녀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까?

2.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

둘째로,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시간의 사명,
행동이나 말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전체 시간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선이거나 악이거나 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τά ἀλλὀτρια
즉, 타인의 재산이요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제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 되었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어느 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된다면
모두가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악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은혜 안에서
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산지식에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 지식을 더하고
우리를 은혜 안에서 성장시키는 사고와 언행은
모두 좋은 것이요,

이 지식을 더하지 않게 하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또는 당연히 악입니다.

3.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림

셋째로,
이 사실에서는 공덕(功德)의 행위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웁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의무 이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저것만 받은 것이 아니요
혹은 많은 것을 받은 것만이 아니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당연히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계셔야만 합니다.

따라서 만일에 우리가 전부가 아니요 그 이하의 것을 하나님께 지불한다면
우리는 충실한 청지기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것입니다”
(고전 3:8) 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만일 우리가 힘껏 일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가 현명한 청지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일들은
무엇이나 버려두지 아니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껏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당신들 중에 명철과 총명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대하2:12),
그 사람은
그 인격에 합당하게 걸음으로써
위로부터의 지혜를 보여야 합니다.

만일에 그가 자신을 그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여러 가지 선물의 청지기로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조리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정하신 그 부서에
적당한 것이 되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지혜와 결의와 인내와 절제의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요구는
당신이 이제까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나
당신이 은혜로써 가질 수 있는 것을
초월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에게 넉넉하며
또 당신이 아는 대로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능하기”(막9:23)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롬13:14)
“하나님이 주시는 전신갑주로 무장하시오”(엡6:13),

그렇게 하면 당신은
자신의 모든 언행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가,
아니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복종으로 향해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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