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esley - 신생의 표적들
본문
신생의 표적들 - 웨슬리 설교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요 3:8)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라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난 모든 사람”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다시 태어났다”
“하나님으로부터 났다”
“영으로부터 났다”
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나
혹은“양자(養子)의 영”을 가진다는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자비의 선물이
종종 세례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세례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거듭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선물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표적이 신생(거듭남)을 구별 짓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신생(新生)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신생에 대해서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0)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생에 대한 질문은 가장 심각한 질문이자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생의 표적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한대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Ⅰ
믿음
성령으로 난 사람의 첫 번째 표적은
다른 모든 표적들의 터전이 되는“믿음”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 3:2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요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 의해 양자로 삼아지는 것 같이
사람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부모들의 육적인 욕망에 따라
어떤 내적인 변화도 없이 거저 태어나는
그런 출생도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요 1:13)입니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요일 5:1) 라고
요한의 서신 서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죽은 믿음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명제에 대한 단순한 동의나,
우리의 신앙고백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신조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명제들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신뢰할 만한 일에 대해서
그저 추상적으로 믿는 정도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확신이나 전적인 확신에 대한
지적(知的)인 동의도 아닙니다.
만일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마귀들도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들도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성경 역시 진리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미쁘시고 참되신 증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들도 믿었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도 보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그 큰 날의 대 심판 아래 두시려고
어두움의 쇠사슬에 여전히 묶어놓고 있는 것입니다.(유다 6절)
그러므로
믿음이란 신적(神的)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나,
혹은 기적의 증거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은 다 죽은 믿음입니다.
2. 살아있는 믿음
참된 기독교 신앙,
살아있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태어나는 것이며,
이것은 단순한 동의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이해하는 행동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내적인 변화(disposition)입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의 확고한 의뢰와 믿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되며,
하나님의 사랑에 화해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기 위하여”(빌3:3~4)
먼저 자기의 의지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지도록
“육체에 대한 모든 신뢰”를
전적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아무런 공로도 없이,
여러분 스스로 행한 일들에 대해,
혹은
여러분이 지닌 어떤 종류의 순수한 의로움에 대해,
그 어떠한 신뢰도 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는
하나의 잃어진 자요,
불쌍한 자이며,
자기 파괴자요,
자기를 정죄하고 망해버린 자로,
또한
입술은 완전히 닫힌 채 절망에 빠진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이 깊은 통회의 감정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절망”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죄의식을 통하여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완전한 확신에 이르게 합니다.
즉
우리의 구원과 그 구원을 사모하는 간절한 열망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함께,
살아있는 믿음,
곧
“자신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속전을 치르셨고,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났다고 하는 그 믿음은,
단순히 우리 신앙의 모든 신조들을 시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
을 진실 되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열매
1) 죄를 이기는 권세
믿음의
즉각적이고 계속적인 열매는
바로 “죄를 이기는 권세”입니다.
이 열매는
그 뿌리인 믿음과 항상 있어야 하며,
잠시라도 분리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1) 외적, 내적인 죄를 이기는 힘
우리는
죄를 이기는 권세를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면으로는,
이 권세가 모든 사악한 말과 행실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도록”(히9:14)
어디에서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면에서 보면,
죄를 이기는 이 권세는 우리의 마음을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질로부터 정화시킵니다.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열매로서 죄를 이기는 권세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절)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을 대신 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까지라도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고”(12절)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13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에게서 해방되어”(18절)
쉽게 설명하면,
비록 여러분이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같은 무한한 특권과
죄를 이기는 권세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내적인 죄뿐만 아니라
외적인 죄를 이기는 권세로서의
그런 활동들과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마치 너무나도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선함에 놀란 사람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 이니라”(요일 3:1,2).
그리고
사도 요한은 즉시 이어서,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9절)
고 기록하였습니다.
(2) 습관적인 죄
이 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습관적으로’죄를 짓지 아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습관적’이라니요?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
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습관적’이란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치려 합니까?
여러분이 덧붙인 해설이
성경 본문 자체의 의미를 집어 삼키려는 경향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한 모든 재앙들을
더하시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하여
메도데이아 프라네스(meqodeia planhs)
즉, 교묘한 속임수에 의해
그 귀한 약속이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쿠베이나 안드로폰(kubeia anqrvpvn)
즉, 사람의 교묘한 속임수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용지물 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십시오!
행여,
성경 안에 기록된 보다 더 넓은 의미와 영감을 떨쳐 버리고
단지 죽은 문자들만 남겨놓아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오히려
사도 요한이 그의 논의의 전체적인 취지와 관련하여
요한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즉
요한일서 3:5를 보면,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으로부터
어떤 추론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6절에 나타나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주의할 것을 경고합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사도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속여
그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미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운 반면에,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일 3:7-8).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이 중에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습니다(요일 3:9-10).
이처럼
명백한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서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2) 평안
살아있는 믿음의 또 다른 열매는 평화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까닭에,
우리의 죄가 말끔히 씻겨 진 까닭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롬5:1)
우리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친히 제자들에게
이 평화를 유언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는 너희)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이러한 주님의 평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인으로서는 마음속에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심지어 영적인 사람이라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영혼의 평온함입니다.
이 평안은
땅의 권세나 지옥의 세력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파도와 폭풍이 몰아친다고 하여도
절대로 이 평화를 파괴할 수 없는 이유는
이 평안이 견고한 반석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은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다.
살기에 편안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행복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던지
그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파동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견고히 서 있는 것입니다.
Ⅱ
소망
성령으로 난 사람의
두 번째 성경의 표적은“소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사”(베드로전서1:3)
1. 죽은 소망과 산 소망
산 믿음에 대하여
죽은 믿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소망은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열매가
스스로 밝혀 주듯이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은 소망은
교만의 열매이기 때문에
모든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하느니라”(요일 3:2~ 3)
2. 소망의 열매
1) 증거
이 소망은
몇 가지의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영어 번역으로는 가능한 한 강하게 표현하여도
성경 원어의 뜻보다 뜻이 약하기는 하지만
“신앙의 철저한 확신” 혹은 “소망의 철저한 확신”
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우리가 단순하게 그리고 아주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우리들의 영혼이나 양심의 증거를 뜻하며,
둘째로는
하나님 영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혹은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상속자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라면
곧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로마서 8:16,17)
라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여기에서
증거 하시겠다고 나서는 분은 누구입니까?
곧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증거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자녀라면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할 사람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각각 자기를 부인하면,
만일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진다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과 능욕을 달게 받으면,
우리도 또한 주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증거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은 누구 안에서 이를 증거 하십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증거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시느니라.”(롬 8:14~16)
우리가 한 주님을 모신 것처럼
우리는 한 영을 모셨습니다.
우리가 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역시 우리는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영”(엡1:13)으로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 하는 동일한 영이십니다.
2) 기쁨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5:4)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님의 증거를 앞선다 하더라도
(두려움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 하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슬픔은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증거를 느끼게 될 때
슬픔은 오히려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 고통이
전에는 어떠한 것이었든지 간에
두려움은 곧 새롭게 거듭났다는 기쁨 때문에
잊혀 질 것입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여러분들은
자신을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으로 생각하며
슬퍼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런 성령님을 지니지 못했음을
자신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시면 여러분의 마음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며
또한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요한 16:22).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뻐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 속죄함을 얻었으며,
이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곧
이 은혜의 상태,
사랑을 입은 상태,
하나님과 화목 된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여기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로마서5:2).
사도 베드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소망을 얻게 된 너희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으니
그러므로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너희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그를 기뻐하도다”(벧전 1:5)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그것을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만나(the hidden manna)입니다.
이 기쁨은
환란의 수렁 속에서도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그 위로가 작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최고조로 달한 곳에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더욱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가오는 멸망,
곧 궁핍이나 고통이나 지옥이나 무덤을 비웃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그 환난들을 무저갱에 던져 넣으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한 환난 때에도,
하늘 보좌로부터 오는 큰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계시록 21:3,4)
Ⅲ
사랑
성령으로 난 사람의
세 번째 성경의 표적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1. 하나님 사랑
사랑은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 주신 것(롬5:5)입니다.
이 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끊임없이 화평과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이런 하나님께 날마다 일용할 양식,
곧 육체를 위한 것이나 영혼을 위한 것이거나 간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시기를
간절히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로 알기 때문에(요일 5:15)
그들의 마음을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 쏟아 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의 즐거움이요, 방패요,
대단히 큰 상급입니다.
영혼의 소원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것이
그들의 음식이요, 음료인 것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그들은 만족해하며
한편 그들의 입은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합니다.”(시63:5)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낳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5:1).
그들의 영이
구주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합니다(에베소서 6:24).
그들은
주님과 밀접히 결합되어서 한 영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께 매달렸고
만인 위에 뛰어난 사랑으로(아가 5:10)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아가 2:16).
“주님은
인자들보다 아름다우시며 은혜가 입술에 가득하시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나이다”(시편 45:2)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2. 하나님 사랑의 열매
1) 이웃 사랑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필연적 결과는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영혼,
곧 우리의 원수와
우리를 능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가 남으로부터 사랑받고자 원하는 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일 4:7~12)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계명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그와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처럼
“이제 우리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우리들의 목숨을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요일 3:16)
우리가
이와 같이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의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긴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같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요일3:14)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로서 난 것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사랑의 영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일4:13)
2) 계명을 지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요일4:7)
그러나
혹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라고 않던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역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계명들(outward commandments)을 지킨다는 것이
“네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혹 어떤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에 대한 어떤 감정”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외적으로 나타나는
섬김(an outward service)이라고
잘못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일종의 눈에 보이기 위한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을
이렇게 거칠게 해석한다면
이는 말씀을 전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머지 모든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징이 되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첫째 되고 위대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만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흘러나오게 되면,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강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3) 전적 순종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열매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요,
(순종이 사랑에서 분리될 수 있다면)
그분의 뜻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순종은
사랑과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어서
그것들을 서로서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순종인 것이고,
모든 성품과 언행에 있어서의 순종입니다.
여기서 뜻하는
가장 분명한 성품의 하나는
“선한 일에 열심 하게”(디도서 2:14)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선을 행하려고
선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전부를 소비하기를,
또 소비되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보상을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의인의 부활로써
만족스러운 보상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Ⅳ
거듭난 자
지금까지
신생에 대한 세 가지 표적,
믿음, 소망, 사랑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설명해 드렸습니다.
1. 성령으로 난 모든 사람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이며,
그 결과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거듭났다는 말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또 언제나 어디에서나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4:7)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망하므로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영과 더불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시는”(롬8:16)
하나님의 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죄를 속량하신 하나님 안에서
항상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여러분들이
남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이제까지 체험해보지 못한 큰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므로,
여러분들이
모든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강권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곧
마음에서만 불탈 뿐 아니라
그 불이
여러분들의 행동과 대화에 불붙어서
여러분의 전 생애를
“사랑의 수고”로 만드신
그 사랑을 가지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이와 같이
하나님께 로서 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요일3:19)
여러분 가운데
이 말씀들을 음미해 본 사람마다
한 진리를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데,
그 진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상태에서
과연 여러분은 누구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을
양자로 삼으신 영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여러분 마음 속 깊은 곳에 던져 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과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할례로
할례 받았던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의 영, 영광의 영이
지금 여러분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3.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마음속으로
“내가 한번 세례 받았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슬프게도
그 결과는 결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탐욕 자와
주정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례 받은 거짓말쟁이와
식언 자가 얼마나 많으며
또 세례 받은 욕설 가,
험구가는 얼마나 부지기수 입니까?
세례 받은 성적 타락자들,
도둑들,
그리고 세례 받은 착취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죄와 허물로 인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중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세례에 의하지 않고서는 새로 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여러분 모두를
소생할 희망도 없는 저주 아래 두는 것이요,
다시 빠져 나올 수 없는
지옥에 맡겨 두는 결과가 됩니다.
4. 진정한 거듭남
진실로, 진실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또한 거듭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세례에 의하여서 거듭났다고 하는
상한 갈대로 만든 지팡이를 더 이상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였음을 누가 부인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러분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듭나야만 합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한 때에
사단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된 표적,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세례를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여러분의 영혼에 이 표적들이 없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것들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러분은 영원히 멸망 받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다면
여러분에게 오직 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서도
지금은 마귀의 자식으로 살고 있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양자의 영을 다시 받게 되면
여러분은 그 영을 통하여“아바, 아버지여!”하고
다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주님의 얼굴을 다시 찾는
준비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양자의 영을 다시 받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바, 아버지여!”하고 부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믿을 힘을 주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보혈로 속죄함
곧 죄의 용서까지라도
얻은 것을 느끼고 알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께 로서 났으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산 소망을 향하여
다시금 태어날 수 있게 하시고,
주님께서 정결하신 것처럼
그들 스스로를 정결케 하도록 하시옵소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오매
사랑과 영광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어
영육 간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자기에게서 씻겨내도록 하시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온전한 성결에 이르도록”
자기 자신을 가르치게 하시옵소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요 3:8)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라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난 모든 사람”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다시 태어났다”
“하나님으로부터 났다”
“영으로부터 났다”
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나
혹은“양자(養子)의 영”을 가진다는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자비의 선물이
종종 세례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세례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거듭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선물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표적이 신생(거듭남)을 구별 짓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신생(新生)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신생에 대해서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0)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생에 대한 질문은 가장 심각한 질문이자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생의 표적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한대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Ⅰ
믿음
성령으로 난 사람의 첫 번째 표적은
다른 모든 표적들의 터전이 되는“믿음”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 3:2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요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 의해 양자로 삼아지는 것 같이
사람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부모들의 육적인 욕망에 따라
어떤 내적인 변화도 없이 거저 태어나는
그런 출생도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요 1:13)입니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요일 5:1) 라고
요한의 서신 서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죽은 믿음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명제에 대한 단순한 동의나,
우리의 신앙고백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신조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명제들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신뢰할 만한 일에 대해서
그저 추상적으로 믿는 정도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확신이나 전적인 확신에 대한
지적(知的)인 동의도 아닙니다.
만일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마귀들도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들도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성경 역시 진리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미쁘시고 참되신 증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들도 믿었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도 보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그 큰 날의 대 심판 아래 두시려고
어두움의 쇠사슬에 여전히 묶어놓고 있는 것입니다.(유다 6절)
그러므로
믿음이란 신적(神的)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나,
혹은 기적의 증거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은 다 죽은 믿음입니다.
2. 살아있는 믿음
참된 기독교 신앙,
살아있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태어나는 것이며,
이것은 단순한 동의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이해하는 행동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내적인 변화(disposition)입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의 확고한 의뢰와 믿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되며,
하나님의 사랑에 화해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기 위하여”(빌3:3~4)
먼저 자기의 의지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지도록
“육체에 대한 모든 신뢰”를
전적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아무런 공로도 없이,
여러분 스스로 행한 일들에 대해,
혹은
여러분이 지닌 어떤 종류의 순수한 의로움에 대해,
그 어떠한 신뢰도 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는
하나의 잃어진 자요,
불쌍한 자이며,
자기 파괴자요,
자기를 정죄하고 망해버린 자로,
또한
입술은 완전히 닫힌 채 절망에 빠진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이 깊은 통회의 감정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절망”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죄의식을 통하여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완전한 확신에 이르게 합니다.
즉
우리의 구원과 그 구원을 사모하는 간절한 열망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함께,
살아있는 믿음,
곧
“자신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속전을 치르셨고,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났다고 하는 그 믿음은,
단순히 우리 신앙의 모든 신조들을 시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
을 진실 되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열매
1) 죄를 이기는 권세
믿음의
즉각적이고 계속적인 열매는
바로 “죄를 이기는 권세”입니다.
이 열매는
그 뿌리인 믿음과 항상 있어야 하며,
잠시라도 분리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1) 외적, 내적인 죄를 이기는 힘
우리는
죄를 이기는 권세를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면으로는,
이 권세가 모든 사악한 말과 행실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도록”(히9:14)
어디에서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면에서 보면,
죄를 이기는 이 권세는 우리의 마음을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질로부터 정화시킵니다.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열매로서 죄를 이기는 권세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절)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을 대신 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까지라도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고”(12절)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13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에게서 해방되어”(18절)
쉽게 설명하면,
비록 여러분이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같은 무한한 특권과
죄를 이기는 권세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내적인 죄뿐만 아니라
외적인 죄를 이기는 권세로서의
그런 활동들과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마치 너무나도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선함에 놀란 사람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 이니라”(요일 3:1,2).
그리고
사도 요한은 즉시 이어서,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9절)
고 기록하였습니다.
(2) 습관적인 죄
이 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습관적으로’죄를 짓지 아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습관적’이라니요?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
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습관적’이란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치려 합니까?
여러분이 덧붙인 해설이
성경 본문 자체의 의미를 집어 삼키려는 경향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한 모든 재앙들을
더하시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하여
메도데이아 프라네스(meqodeia planhs)
즉, 교묘한 속임수에 의해
그 귀한 약속이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쿠베이나 안드로폰(kubeia anqrvpvn)
즉, 사람의 교묘한 속임수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용지물 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십시오!
행여,
성경 안에 기록된 보다 더 넓은 의미와 영감을 떨쳐 버리고
단지 죽은 문자들만 남겨놓아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오히려
사도 요한이 그의 논의의 전체적인 취지와 관련하여
요한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즉
요한일서 3:5를 보면,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으로부터
어떤 추론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6절에 나타나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주의할 것을 경고합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사도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속여
그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미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운 반면에,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일 3:7-8).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이 중에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습니다(요일 3:9-10).
이처럼
명백한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서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2) 평안
살아있는 믿음의 또 다른 열매는 평화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까닭에,
우리의 죄가 말끔히 씻겨 진 까닭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롬5:1)
우리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친히 제자들에게
이 평화를 유언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는 너희)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이러한 주님의 평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인으로서는 마음속에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심지어 영적인 사람이라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영혼의 평온함입니다.
이 평안은
땅의 권세나 지옥의 세력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파도와 폭풍이 몰아친다고 하여도
절대로 이 평화를 파괴할 수 없는 이유는
이 평안이 견고한 반석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은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다.
살기에 편안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행복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던지
그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파동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견고히 서 있는 것입니다.
Ⅱ
소망
성령으로 난 사람의
두 번째 성경의 표적은“소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사”(베드로전서1:3)
1. 죽은 소망과 산 소망
산 믿음에 대하여
죽은 믿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소망은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열매가
스스로 밝혀 주듯이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은 소망은
교만의 열매이기 때문에
모든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하느니라”(요일 3:2~ 3)
2. 소망의 열매
1) 증거
이 소망은
몇 가지의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영어 번역으로는 가능한 한 강하게 표현하여도
성경 원어의 뜻보다 뜻이 약하기는 하지만
“신앙의 철저한 확신” 혹은 “소망의 철저한 확신”
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우리가 단순하게 그리고 아주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우리들의 영혼이나 양심의 증거를 뜻하며,
둘째로는
하나님 영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혹은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상속자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라면
곧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로마서 8:16,17)
라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여기에서
증거 하시겠다고 나서는 분은 누구입니까?
곧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증거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자녀라면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할 사람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각각 자기를 부인하면,
만일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진다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과 능욕을 달게 받으면,
우리도 또한 주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증거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은 누구 안에서 이를 증거 하십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증거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시느니라.”(롬 8:14~16)
우리가 한 주님을 모신 것처럼
우리는 한 영을 모셨습니다.
우리가 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역시 우리는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영”(엡1:13)으로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 하는 동일한 영이십니다.
2) 기쁨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5:4)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님의 증거를 앞선다 하더라도
(두려움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 하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슬픔은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증거를 느끼게 될 때
슬픔은 오히려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 고통이
전에는 어떠한 것이었든지 간에
두려움은 곧 새롭게 거듭났다는 기쁨 때문에
잊혀 질 것입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여러분들은
자신을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으로 생각하며
슬퍼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런 성령님을 지니지 못했음을
자신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시면 여러분의 마음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며
또한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요한 16:22).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뻐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 속죄함을 얻었으며,
이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곧
이 은혜의 상태,
사랑을 입은 상태,
하나님과 화목 된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여기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로마서5:2).
사도 베드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소망을 얻게 된 너희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으니
그러므로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너희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그를 기뻐하도다”(벧전 1:5)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그것을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만나(the hidden manna)입니다.
이 기쁨은
환란의 수렁 속에서도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그 위로가 작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최고조로 달한 곳에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더욱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가오는 멸망,
곧 궁핍이나 고통이나 지옥이나 무덤을 비웃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그 환난들을 무저갱에 던져 넣으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한 환난 때에도,
하늘 보좌로부터 오는 큰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계시록 21:3,4)
Ⅲ
사랑
성령으로 난 사람의
세 번째 성경의 표적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1. 하나님 사랑
사랑은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 주신 것(롬5:5)입니다.
이 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끊임없이 화평과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이런 하나님께 날마다 일용할 양식,
곧 육체를 위한 것이나 영혼을 위한 것이거나 간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시기를
간절히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로 알기 때문에(요일 5:15)
그들의 마음을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 쏟아 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의 즐거움이요, 방패요,
대단히 큰 상급입니다.
영혼의 소원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것이
그들의 음식이요, 음료인 것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그들은 만족해하며
한편 그들의 입은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합니다.”(시63:5)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낳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5:1).
그들의 영이
구주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합니다(에베소서 6:24).
그들은
주님과 밀접히 결합되어서 한 영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께 매달렸고
만인 위에 뛰어난 사랑으로(아가 5:10)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아가 2:16).
“주님은
인자들보다 아름다우시며 은혜가 입술에 가득하시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나이다”(시편 45:2)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2. 하나님 사랑의 열매
1) 이웃 사랑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필연적 결과는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영혼,
곧 우리의 원수와
우리를 능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가 남으로부터 사랑받고자 원하는 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일 4:7~12)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계명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그와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처럼
“이제 우리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우리들의 목숨을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요일 3:16)
우리가
이와 같이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의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긴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같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요일3:14)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로서 난 것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사랑의 영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일4:13)
2) 계명을 지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요일4:7)
그러나
혹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라고 않던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역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계명들(outward commandments)을 지킨다는 것이
“네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혹 어떤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에 대한 어떤 감정”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외적으로 나타나는
섬김(an outward service)이라고
잘못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일종의 눈에 보이기 위한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을
이렇게 거칠게 해석한다면
이는 말씀을 전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머지 모든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징이 되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첫째 되고 위대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만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흘러나오게 되면,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강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3) 전적 순종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열매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요,
(순종이 사랑에서 분리될 수 있다면)
그분의 뜻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순종은
사랑과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어서
그것들을 서로서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순종인 것이고,
모든 성품과 언행에 있어서의 순종입니다.
여기서 뜻하는
가장 분명한 성품의 하나는
“선한 일에 열심 하게”(디도서 2:14)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선을 행하려고
선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전부를 소비하기를,
또 소비되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보상을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의인의 부활로써
만족스러운 보상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Ⅳ
거듭난 자
지금까지
신생에 대한 세 가지 표적,
믿음, 소망, 사랑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설명해 드렸습니다.
1. 성령으로 난 모든 사람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이며,
그 결과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거듭났다는 말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또 언제나 어디에서나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4:7)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망하므로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영과 더불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시는”(롬8:16)
하나님의 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죄를 속량하신 하나님 안에서
항상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여러분들이
남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이제까지 체험해보지 못한 큰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므로,
여러분들이
모든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강권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곧
마음에서만 불탈 뿐 아니라
그 불이
여러분들의 행동과 대화에 불붙어서
여러분의 전 생애를
“사랑의 수고”로 만드신
그 사랑을 가지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이와 같이
하나님께 로서 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요일3:19)
여러분 가운데
이 말씀들을 음미해 본 사람마다
한 진리를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데,
그 진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상태에서
과연 여러분은 누구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을
양자로 삼으신 영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여러분 마음 속 깊은 곳에 던져 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과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할례로
할례 받았던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의 영, 영광의 영이
지금 여러분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3.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마음속으로
“내가 한번 세례 받았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슬프게도
그 결과는 결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탐욕 자와
주정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례 받은 거짓말쟁이와
식언 자가 얼마나 많으며
또 세례 받은 욕설 가,
험구가는 얼마나 부지기수 입니까?
세례 받은 성적 타락자들,
도둑들,
그리고 세례 받은 착취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죄와 허물로 인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중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세례에 의하지 않고서는 새로 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여러분 모두를
소생할 희망도 없는 저주 아래 두는 것이요,
다시 빠져 나올 수 없는
지옥에 맡겨 두는 결과가 됩니다.
4. 진정한 거듭남
진실로, 진실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또한 거듭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세례에 의하여서 거듭났다고 하는
상한 갈대로 만든 지팡이를 더 이상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였음을 누가 부인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러분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듭나야만 합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한 때에
사단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된 표적,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세례를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여러분의 영혼에 이 표적들이 없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것들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러분은 영원히 멸망 받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다면
여러분에게 오직 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서도
지금은 마귀의 자식으로 살고 있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양자의 영을 다시 받게 되면
여러분은 그 영을 통하여“아바, 아버지여!”하고
다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주님의 얼굴을 다시 찾는
준비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양자의 영을 다시 받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바, 아버지여!”하고 부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믿을 힘을 주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보혈로 속죄함
곧 죄의 용서까지라도
얻은 것을 느끼고 알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께 로서 났으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산 소망을 향하여
다시금 태어날 수 있게 하시고,
주님께서 정결하신 것처럼
그들 스스로를 정결케 하도록 하시옵소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오매
사랑과 영광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어
영육 간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자기에게서 씻겨내도록 하시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온전한 성결에 이르도록”
자기 자신을 가르치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