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esley - 성경적 구원의 길
본문
성경적 구원의 길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너희가 …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Ⅰ
서론
지금까지
종교에 대하여 종종 설명된 바와 같이
종교라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종교에 있어서도
그것도 그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사람의 종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의 종교에 대하여도,
그것도
기독교 세계 안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
기둥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종교에 관하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묘사된 대로
그것을 본래의 형태로만 취하여 본다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얼마나 이해하기 쉽고 명백하며,
간단하고 단순한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교는
이 세상의 현명하신 창조자시오,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이해력이 부족하고 수용력이 적은
현재의 인간에게 주어진 아주 적절한 종교입니다.
이 종교가 말하는 바
그 목적과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은 참으로 분명합니다.
그 목적은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이요,
그것을 얻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이 두 개의 작은 단어가,
즉,
믿음과 구원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전체의 정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들에 관하여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Ⅱ
구원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간다든가,
영원한 행복이라든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하는 파라다이스로 영혼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죽음이라는 저 편
또는 다른 세상에 있는 복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설교의
본문 말씀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너희는 구원을 얻었나니”(You are saved)
이것은 멀리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현재적인 것을 말합니다.
곧,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지금 가지고 있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느니라.”
(You have been saved)고 현재완료로 번역될 수 있고, 뜻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은혜가 영혼 안에 처음 동터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구원이
영광 안에서 완성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역사(役事) 전체에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선행적 은총
우리가
이 구원을 최대한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이는 우리가 종종 말하는
‘자연적 양심’이라고 표현하나
보다 더 적당하게 표현한다면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에 의하여
우리 영혼 안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선행적 은총이라 함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 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우리가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점점 증가 하는 그 마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하시는 빛,
즉,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지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선행적 은총이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시어 깨닫게 하시는 것
전부를 말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뉘우침들을 가능한 한 빨리 질식시키며,
한 동안 후에는 잊어버리며,
또는 기껏해야 그런 뉘우침들을 가졌던 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직접 말하고 있는
그 구원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합니다.
이 구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곧 칭의와 성화입니다.
2. 칭의(稱義)
칭의(Justification)라는 말은
용서를 의미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받아들여지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를 위하여 취하는 값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우리의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이 값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즉,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다 쏟는 데까지 행하셨고
고통을 당하신 모든 것이란 말씀입니다.
칭의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
곧‘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기뻐하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고 영광으로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3. 성화(聖化)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입는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성화(Sanctification)가 시작됩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거듭납니다.
위로부터 나고 성령으로 납니다.
(1) 거듭남
여기에는 실질적인 변화와 상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이 사랑이
세상에 대한 사랑, 쾌락에 대한 사랑, 안락에 대한 사랑,
명예에 대한 사랑, 돈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교만, 혈기, 자기의지, 다른 모든 악한 기질들을
몰아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으로 모든 인류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일으켜 줍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이고 감각적이며, 악마적인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2) 죄를 깨달음
그러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든 죄가 다 사라졌다고,
죄가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뿌리 뽑혀져 나갔다고,
더 이상 그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쉽게 그들은
‘나는 죄를 하나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추론하겠습니까!
‘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죄가 움직임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가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
고 그들은 얼마나 쉽게 추론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견해가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죄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이지
멸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다시 오고 죄는 살아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전에 단지 기절하였던 것이지
죽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저들은 자기들 속에
두 가지 세력 곧 상반되는 두 세력이 있음을 느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거슬리는 육성이 있어
하나님의 은총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힘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저들의 영과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속에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또는 여럿이 자주,
그들의 마음 안에서 지배하지는 않을지라도
휘젓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혹은
이것들이 그들을 심하게 밀쳐서,
실족하게 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종종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까닭입니다.(시편118: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현재의 이러한 경험을
1400년 전에 마카리우스(Macarius)가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익숙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총이 역사할 때
자기들은 죄가 하나도 없노라고 상상을 합니다.
그 반면에
사려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진 우리조차도
또 다시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그들 안에 아무 죄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만큼의 은혜를 경험했었지만
결국에 그들이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 속에 잠복해 있던 부패성이 다시 휘저어져서,
그들은 거의 혈기를 내게 되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성화의 점진적 역사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성화의 점진적인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의 행위와 악한 성질에서 나오는 행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멀리하려고 조심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갑니다.
또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다시금 은혜에서 은혜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와 같이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라고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온전한 성결,
즉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 등 우리들의 모든 죄에서
완전한 자리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 입니까?
이 완전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죄를 내쫓는 사랑이며
또한 영혼의 전체를 주관하고
온 마음을 채우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Ⅲ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점입니다.
1. 영적 세계의 증거
일반적인 의미의 믿음이란
사도에 의하여‘엘레그코스 프라그마톤 우 블레포메논’
(ἔλεϒϰος πραϒμάτων οὐ βλεπομένων) 이라고
정의되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곧 이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 또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ἔλεϒϰος라는 단어는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인간의 시야로나 그 외의 어떤 외적인 감각으로는
볼 수도 없고 지각 할 수도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다 함축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관한 초자연적 증거,
영혼에게 나타내진 일종의 영적인 빛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그것을 초자연적으로 보는 것 또는 감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때로는 하나님이 빛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때로는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또 다른 곳에서는
“우리 이해의 눈을 밝히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의 눈을 여시고
그리고 그 눈에 빛을 비추시는
두 가지 작용에 의하여
자연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는 것들을
이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자연적인 지능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우리 주위에 있는
영의 세계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세계를
시간과 영원 사이에 매달린 휘장을 통하여
엿볼 수 있습니다.
구름과 흑암이 더 이상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으니
우리는 앞으로 나타날 그 영광을
이미 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사랑의 증거
(1) 예수 그리스도
믿음이라는 단어의 좀 더 특수한 의미에 있어서는
믿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으며 그 자신을 나를 위해 내주셨다’
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와
이에 의하여 설득된 확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의 모든 직분에 있어서
받아들이는 것,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을 이 믿음의 핵심이라고 부르든지
또는 오히려 믿음의 고유성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바로 이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심을 압니다.
(2) 하나의 믿음
그러면 이것이
‘확신이라는 의미의 믿음’(faith of assurance) 인가
혹은 ‘충성이란 의미의 믿음’(faith of adherence)인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우리를 부르심에서 오는
하나의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한 분뿐이시고,
우리 모두에게 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 같이,
하나의 구원하는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3) 자녀됨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셨다는
확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확신이라는 말은
단지 증거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며, 이 양자의 차이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믿는 자는 그 자신 안에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주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신뢰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치적으로 보아서
이 확신이 신뢰에 선행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까지
하나님을 어린 아이와 같이 신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어 신뢰하는 것(confidence),
믿어 신용하는 것(trust),
믿어 의지하는 것(reliance),
믿어 충성하는 것(adherence)
또는 그 외에 무어라고 부르든지 간에,
이런 것들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믿음의 첫 번째 가지가 아니라
두 번째 가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칭의 받고 성화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믿음에 의하여 구원함을 받으며,
의롭다함을 받고,
또한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Ⅳ
우리는 이 믿음에 의하여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으며,
성결함을 받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세 번째로 상고하여 보려는 주제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 물음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것이니
이 문제를 좀 더 분명하게 특별히 고찰해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1. 칭의
그러면 먼저
어떻게 우리가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까?
어떤 의미로 이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1) 칭의의 조건
나는 답변합니다.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요, 그것도 유일한 조건입니다.
우선,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라는 말은
곧 믿는 자는 누구나 의롭다 함을 못 받는 자가 없으며
또한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유일한 조건이라는 말은
칭의를 위하여서는
믿음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믿음 외에
그가 다른 무엇을 가졌든 안 가졌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사람이 믿기 전에는 아무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으며
믿을 때는 누구든지 의롭다함을 입는 것입니다.
(2) 회개와 열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명하여 회개하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즉 악한 행실을 그치고
잘 행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니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모두가 아니냐?”
“만일 우리가 이것 중 어느 것 하나를 등한시하면
이론적으로 보아서 의롭다함을 입기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에게 회개도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가운데
어떤 하나라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
칭의 받기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
이 두 가지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칭의 받는데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믿음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선 같은 정도로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단지 조건적으로만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으면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십자가상의 그 도둑이 칭의를 받은 것처럼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한 시간도 기회도 없는 경우에는
회개의 열매 없이도
칭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그는 칭의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의 강도를 강도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나 후대의 사람은
그가 강도가 아니었고 정직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아무리 많이 맺었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믿기 전에는 칭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순간에,
회개의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심지어 회개가 많든지 적든지 관계없이,
그는 의롭다 함을 입게 됩니다.
또한,
같은 의미로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회개의 열매는
단지 우회적으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즉,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 반면에
믿음은 칭의를 받기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칭의를 받기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가장 가깝게
필수적인 유일한 조건인 것입니다.
2. 성화
(1)성화의 조건
“너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화됨을 믿느냐?”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성결함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25년 동안(1738~1763, 역자 주)
이렇게들 부정확하게 열심히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이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방법에 있어서 정반대입니다.
나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우리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같이
성화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는 것을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진리 중 하나는,
곧 칭의의 진리가 성화의 도리를
잘 설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성화의 조건입니다.
칭의에서 그랬듯이
성화에 있어서도 이 믿음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 치고 성화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성화 받지 못합니다.
이 믿음이
단 하나의 조건이요
또 성화를 받기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믿는 자가
무엇을 가졌든 못 가졌든 그는 성결함을 받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믿기 전에는 성화되지 못 하나
믿을 때에는 누구든지 성화된다는 말씀입니다.
(2) 선행
“그러나 회개가 칭의 전에 있었던 것같이
칭의 뒤에도 회개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은 모두
선행에 열심이어야 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냐?”
“그뿐인가?
회개와 선행은 꼭 필요한 것으로써
사람이 만약 고의로 이것들을 등한시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성결함을 받으리라고는,
곧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리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냐?”
“아니, 이것들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은혜 가운데서,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지식 가운데서
어떻게 성장할 수가 있겠느냐?”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지속할 수 있겠느냐?
그가 이미 받은 신앙에서,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계속 있을 수 있겠느냐?”
“너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계속 주장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이 성결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리라고 지지합니다.
칭의 전에 회개가 있는 것과 같이,
칭의 후에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칭의를 얻은 사람은 모두
선행에 열심이어야 할 의무가 있음도 인정합니다.
이것들은 꼭 필요하므로
만약에 이를 서슴지 않고 등한시하면
그가 성결함을 받으리라고는
이치로 보아서 기대할 수 없으며,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에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는 그가 이미 받은 은혜를 지속할 수도 없으며
신앙 안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 올바르게 이해된 이 회개와
모든 선한 일의 실천 곧 자비의 행위나 경건한 행위들이
(이것이 신앙에서 나온 까닭에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나 모두
성결하게 되는 데 필요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3) 믿는 자의 회개
1) 마음속의 죄
나는 여기서
‘바르게 이해된 회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회개를 전에 말한 회개와
혼동하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이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며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죄는
‘프로네마 사르코스’(φρόνημα σαρκός),
곧, 육에 속한 마음이며
우리 교회가 말하는 대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비록 우세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악에로의 성벽,
타락하기 쉬운 마음,
아직 머물러 있어 성령에 거슬리는 육의 경향성 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이것은 때때로
자만이나 고집, 분노로 발정하며,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곧 세상을 더 사랑하고,
안락을 더 사랑하고.
명예나 향락을 더 사랑하는 것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우리 마음속에 고집, 무신사상, 우상숭배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런 죄들에 의해서
우리는 천 가지 방법,
천 가지 모양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2) 행함 속에 있는 죄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를 깨달음과 함께
우리의 생활에 남아 있는 죄,
곧,
우리의 말과 행위에 아직도 고착되어 있는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병행합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최상의 것이라 할지라도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또는 방법에 있어서 악이 혼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한 것을 낱낱이 지적하신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아무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별로 생각하지 않던 것에서
자만이라든가
고집,
불신앙,
우상숭배 등의 오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에 우리가 흉악한 죄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던 것 이상으로
지금 우리의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일이라는 것은
그 안에 공적이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 때
감히 자랑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언약의 보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없노라고
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전적 무능
체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우리의 말과 행위에 고착된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만약 대속의 피로 계속하여 뿌림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자신 때문에 죄책을 스스로 져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회개에는 또 하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곧
우리의 힘으로 어떤 착한 생각을 하거나
좋은 소원을 가진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올바른 말을 한다거나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전능하신 은혜가 먼저 우리들에 앞서서 역사하시고
매순간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화에 필요한 선행
그러면 성결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선행(善行)은 무엇입니까?
1) 경건의 행위
첫째로,
같이 모여서 드리는 기도,
가족기도,
혼자 밀실에서 드리는 기도,
성만찬을 받는 것,
성경을 들으며 읽으며 명상하면서 탐구하는 것,
우리의 육신의 건강이 하락하는 범위 내에서
금식이나 일정 음식을 삼가는 것과 같은
모든 경건의 행위들인 것입니다.
2) 자비의 행위
둘째로,
모든 자비의 행위들입니다.
이는
사람의 몸에 관련된 것이든
영혼에 관련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배고픈 자를 먹이기,
헐벗은 자를 입히기,
낯 설은 자를 재우기,
감옥에 있는 자들을 방문하기,
병든 자들을 방문하기,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들을 방문하기,
그리고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기,
어리석은 죄인을 깨우기,
미지근한 자들을 분발시키기,
동요하는 자들을 굳세게 하기,
의지가 박약한 자들을 위로하기,
유혹 받는 자들을 구조하기,
또는 영혼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헌하기,
이것이 완전한 성화를 위해 필수적인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완전한 성화를 기다리기 위해서 가도록
지정하신 길입니다.
3) 조건적 필요
여기에 극단적으로 해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습니다.
즉,
이 해로운 의견이라는 것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나 실상은 해로운 것
곧
“신자에게는 죄가 없다”는 의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의롭다함을 입는 그 순간에
모든 죄는 그 뿌리와 가지가 모두
멸절되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는
회개를 전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결국은 성결에로의 길을
아주 차단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에나 생활에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회개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온전해질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사랑에 이르는 데는 회개,
곧 깨달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한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무 위험도 없으리라는 견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사 잘못 알아서 그런 은혜가
결코 얻어지지 않았고,
얻어질 수 없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래도 우리는 손해 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이렇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활기를 주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발전시켜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은 우리가 주신 달란트를 그가 남긴 것과 함께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온전한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인정하지만,
이것들이
믿음과 같은 정도나,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결코 동등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매들은 필요하지만
조건부로 필요한 까닭입니다.
즉,
그런 시간과 기회에 따라 필요한 것이기에
그런 열매 없이도 성결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성결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하고,
또 많은 선행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결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곧
그가 믿기 전에는 성결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순간에는
이런 회개와 열매를 많이 가지고 믿었든
적게 가지고 믿었든,
심지어 열매가 없다고 해도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회개와 열매는 부차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결함을 받는 데도
믿음이 즉각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만이 성결함을 받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며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완전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성결함을 받고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아
사랑 안에서 온전하여진다 할 때
그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약속
첫째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성경에 약속하셨다는 것에 대한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충분히 알기까지는
일보의 전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옛 약속을 보아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으리만큼 분명합니다.
즉,
약속하시기를
“내가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케하리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명백하게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또 얼마나 강하게
모든 죄에서 구원 받은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사랑이
온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한,
죄가 깃들일 틈이 그 안에 있겠습니까?
(2) 약속하신 것을 행하는 능력
둘째로,
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그가 이루실 수 있다고 하는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는
불결한 데서 깨끗한 것을 나타내며.
마음을모든 죄에서 정결케 하고
거룩한 것으로 채운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는 것을 알므로 이런 경우 아무런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런 일이
전능자의 힘이 아니고
그 밖의 다른 힘으로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아직까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3) 지금 행하심
셋째로,
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실 수 있으며
또한 지금 이를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데 대한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 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는 한 순간이 천년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룩하시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한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그가 존귀케 하시려는 사람에게
그 이상의 가치라든가 적합성을 원하시거나,
기다리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어느 시점에든지,
“보라 지금은 구원의날 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
“보라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
(히 4:7, 시 95:11, 막 22:4)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완전케 하심
이 확신,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결케 하여 주실 수 있고
또 지금 우리를 성결케 하려고 하신다는 확신 외에
또 하나 첨가되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신다는 신적인 증거와 확신입니다.
이것은 그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 때에
영혼은 모든 죄의 더러움에서 정결해집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여집니다.
그 때에 신자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엄숙한 말씀의 깊은 뜻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Ⅴ
결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큰 일을
우리의 영혼 속에서 점차적으로 하십니까?,
아니면 순간적으로 하십니까?
아마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저들이 죄가 끊어지는
그런 특수한 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뜻일진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곧
주님께서 그의 입김으로
눈 깜짝하는 순간에 죄를 멸하신다는 것이
훨씬 더 바랄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일반 적으로 그렇게 행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로서
이에 대하여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납득될 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매순간 이것을 찾으십시오!
위에서 설명한 방법에서 그 증거를 찾으십시오!
즉,
그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으니
모든 선행 안에서 증거를 찾으십시오.
설사 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여도
더 악화될 위험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바라는 일에서 실망을 당한다 하여도
손해 보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실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고 올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매시 매순간 그것을 구하십시오!
어찌하여 이 시간 이 순간에 찾지 않으십니까?
분명히 여러분이 신앙으로 그렇다고 믿을진대,
지금 이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증거에 의하여 여러분은 과연
이를 믿음으로 구하고 있는지,
선행으로 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선행에 의하여
무엇인가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결함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먼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또는
‘이렇게 행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오늘까지 이것을
선행으로 얻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으로 이것을 찾는다면,
당신의 현재 그대로의 상태에서(as you are)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현 상태로 가능하다면
지금 곧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다음 세 가지 점에
불가분리의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즉,
이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이들 중 하나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이들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인정하는 것은
곧 전부를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원칙에 진실하십시오!
그리고 이 축복을 구하십시오!
구하시되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just you are),
곧 더 나은 상태나 더 악화된 상태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가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지불할 것 없는,
또한 간구할 것도 없는,
다만 가엾은 죄인의 자리에서 구하십시오.
당신이 있는 그대로에서 이것을 구하신다면,
지금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지연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어찌하여 지연시키려고 하십니까?
그리스도는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당신의 원하는 바의 전부이십니다.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문 앞에서 계십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부르짖으십시오.
그대, 하늘의 손님이시여! 들어오시오, 들어오시오.
그리고는 다시 떠나지 마시고 저와 더불어 먹으며
이 잔치가 영원한 사람의 잔치가 되게 하옵소서.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너희가 …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Ⅰ
서론
지금까지
종교에 대하여 종종 설명된 바와 같이
종교라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종교에 있어서도
그것도 그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사람의 종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의 종교에 대하여도,
그것도
기독교 세계 안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
기둥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종교에 관하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묘사된 대로
그것을 본래의 형태로만 취하여 본다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얼마나 이해하기 쉽고 명백하며,
간단하고 단순한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교는
이 세상의 현명하신 창조자시오,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이해력이 부족하고 수용력이 적은
현재의 인간에게 주어진 아주 적절한 종교입니다.
이 종교가 말하는 바
그 목적과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은 참으로 분명합니다.
그 목적은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이요,
그것을 얻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이 두 개의 작은 단어가,
즉,
믿음과 구원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전체의 정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들에 관하여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Ⅱ
구원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간다든가,
영원한 행복이라든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하는 파라다이스로 영혼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죽음이라는 저 편
또는 다른 세상에 있는 복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설교의
본문 말씀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너희는 구원을 얻었나니”(You are saved)
이것은 멀리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현재적인 것을 말합니다.
곧,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지금 가지고 있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느니라.”
(You have been saved)고 현재완료로 번역될 수 있고, 뜻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은혜가 영혼 안에 처음 동터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구원이
영광 안에서 완성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역사(役事) 전체에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선행적 은총
우리가
이 구원을 최대한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이는 우리가 종종 말하는
‘자연적 양심’이라고 표현하나
보다 더 적당하게 표현한다면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에 의하여
우리 영혼 안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선행적 은총이라 함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 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우리가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점점 증가 하는 그 마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하시는 빛,
즉,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지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선행적 은총이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시어 깨닫게 하시는 것
전부를 말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뉘우침들을 가능한 한 빨리 질식시키며,
한 동안 후에는 잊어버리며,
또는 기껏해야 그런 뉘우침들을 가졌던 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직접 말하고 있는
그 구원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합니다.
이 구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곧 칭의와 성화입니다.
2. 칭의(稱義)
칭의(Justification)라는 말은
용서를 의미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받아들여지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를 위하여 취하는 값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우리의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이 값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즉,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다 쏟는 데까지 행하셨고
고통을 당하신 모든 것이란 말씀입니다.
칭의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
곧‘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기뻐하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고 영광으로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3. 성화(聖化)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입는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성화(Sanctification)가 시작됩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거듭납니다.
위로부터 나고 성령으로 납니다.
(1) 거듭남
여기에는 실질적인 변화와 상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이 사랑이
세상에 대한 사랑, 쾌락에 대한 사랑, 안락에 대한 사랑,
명예에 대한 사랑, 돈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교만, 혈기, 자기의지, 다른 모든 악한 기질들을
몰아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으로 모든 인류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일으켜 줍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이고 감각적이며, 악마적인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2) 죄를 깨달음
그러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든 죄가 다 사라졌다고,
죄가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뿌리 뽑혀져 나갔다고,
더 이상 그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쉽게 그들은
‘나는 죄를 하나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추론하겠습니까!
‘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죄가 움직임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가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
고 그들은 얼마나 쉽게 추론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견해가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죄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이지
멸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다시 오고 죄는 살아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전에 단지 기절하였던 것이지
죽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저들은 자기들 속에
두 가지 세력 곧 상반되는 두 세력이 있음을 느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거슬리는 육성이 있어
하나님의 은총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힘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저들의 영과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속에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또는 여럿이 자주,
그들의 마음 안에서 지배하지는 않을지라도
휘젓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혹은
이것들이 그들을 심하게 밀쳐서,
실족하게 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종종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까닭입니다.(시편118: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현재의 이러한 경험을
1400년 전에 마카리우스(Macarius)가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익숙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총이 역사할 때
자기들은 죄가 하나도 없노라고 상상을 합니다.
그 반면에
사려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진 우리조차도
또 다시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그들 안에 아무 죄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만큼의 은혜를 경험했었지만
결국에 그들이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 속에 잠복해 있던 부패성이 다시 휘저어져서,
그들은 거의 혈기를 내게 되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성화의 점진적 역사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성화의 점진적인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의 행위와 악한 성질에서 나오는 행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멀리하려고 조심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갑니다.
또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다시금 은혜에서 은혜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와 같이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라고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온전한 성결,
즉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 등 우리들의 모든 죄에서
완전한 자리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 입니까?
이 완전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죄를 내쫓는 사랑이며
또한 영혼의 전체를 주관하고
온 마음을 채우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Ⅲ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점입니다.
1. 영적 세계의 증거
일반적인 의미의 믿음이란
사도에 의하여‘엘레그코스 프라그마톤 우 블레포메논’
(ἔλεϒϰος πραϒμάτων οὐ βλεπομένων) 이라고
정의되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곧 이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 또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ἔλεϒϰος라는 단어는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인간의 시야로나 그 외의 어떤 외적인 감각으로는
볼 수도 없고 지각 할 수도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다 함축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관한 초자연적 증거,
영혼에게 나타내진 일종의 영적인 빛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그것을 초자연적으로 보는 것 또는 감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때로는 하나님이 빛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때로는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또 다른 곳에서는
“우리 이해의 눈을 밝히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의 눈을 여시고
그리고 그 눈에 빛을 비추시는
두 가지 작용에 의하여
자연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는 것들을
이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자연적인 지능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우리 주위에 있는
영의 세계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세계를
시간과 영원 사이에 매달린 휘장을 통하여
엿볼 수 있습니다.
구름과 흑암이 더 이상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으니
우리는 앞으로 나타날 그 영광을
이미 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사랑의 증거
(1) 예수 그리스도
믿음이라는 단어의 좀 더 특수한 의미에 있어서는
믿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으며 그 자신을 나를 위해 내주셨다’
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와
이에 의하여 설득된 확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의 모든 직분에 있어서
받아들이는 것,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을 이 믿음의 핵심이라고 부르든지
또는 오히려 믿음의 고유성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바로 이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심을 압니다.
(2) 하나의 믿음
그러면 이것이
‘확신이라는 의미의 믿음’(faith of assurance) 인가
혹은 ‘충성이란 의미의 믿음’(faith of adherence)인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우리를 부르심에서 오는
하나의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한 분뿐이시고,
우리 모두에게 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 같이,
하나의 구원하는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3) 자녀됨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셨다는
확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확신이라는 말은
단지 증거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며, 이 양자의 차이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믿는 자는 그 자신 안에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주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신뢰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치적으로 보아서
이 확신이 신뢰에 선행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까지
하나님을 어린 아이와 같이 신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어 신뢰하는 것(confidence),
믿어 신용하는 것(trust),
믿어 의지하는 것(reliance),
믿어 충성하는 것(adherence)
또는 그 외에 무어라고 부르든지 간에,
이런 것들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믿음의 첫 번째 가지가 아니라
두 번째 가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칭의 받고 성화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믿음에 의하여 구원함을 받으며,
의롭다함을 받고,
또한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Ⅳ
우리는 이 믿음에 의하여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으며,
성결함을 받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세 번째로 상고하여 보려는 주제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 물음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것이니
이 문제를 좀 더 분명하게 특별히 고찰해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1. 칭의
그러면 먼저
어떻게 우리가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까?
어떤 의미로 이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1) 칭의의 조건
나는 답변합니다.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요, 그것도 유일한 조건입니다.
우선,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라는 말은
곧 믿는 자는 누구나 의롭다 함을 못 받는 자가 없으며
또한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유일한 조건이라는 말은
칭의를 위하여서는
믿음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믿음 외에
그가 다른 무엇을 가졌든 안 가졌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사람이 믿기 전에는 아무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으며
믿을 때는 누구든지 의롭다함을 입는 것입니다.
(2) 회개와 열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명하여 회개하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즉 악한 행실을 그치고
잘 행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니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모두가 아니냐?”
“만일 우리가 이것 중 어느 것 하나를 등한시하면
이론적으로 보아서 의롭다함을 입기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에게 회개도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가운데
어떤 하나라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
칭의 받기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
이 두 가지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칭의 받는데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믿음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선 같은 정도로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단지 조건적으로만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으면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십자가상의 그 도둑이 칭의를 받은 것처럼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한 시간도 기회도 없는 경우에는
회개의 열매 없이도
칭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그는 칭의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의 강도를 강도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나 후대의 사람은
그가 강도가 아니었고 정직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아무리 많이 맺었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믿기 전에는 칭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순간에,
회개의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심지어 회개가 많든지 적든지 관계없이,
그는 의롭다 함을 입게 됩니다.
또한,
같은 의미로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회개의 열매는
단지 우회적으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즉,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 반면에
믿음은 칭의를 받기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칭의를 받기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가장 가깝게
필수적인 유일한 조건인 것입니다.
2. 성화
(1)성화의 조건
“너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화됨을 믿느냐?”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성결함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25년 동안(1738~1763, 역자 주)
이렇게들 부정확하게 열심히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이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방법에 있어서 정반대입니다.
나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우리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같이
성화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는 것을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진리 중 하나는,
곧 칭의의 진리가 성화의 도리를
잘 설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성화의 조건입니다.
칭의에서 그랬듯이
성화에 있어서도 이 믿음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 치고 성화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성화 받지 못합니다.
이 믿음이
단 하나의 조건이요
또 성화를 받기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믿는 자가
무엇을 가졌든 못 가졌든 그는 성결함을 받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믿기 전에는 성화되지 못 하나
믿을 때에는 누구든지 성화된다는 말씀입니다.
(2) 선행
“그러나 회개가 칭의 전에 있었던 것같이
칭의 뒤에도 회개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은 모두
선행에 열심이어야 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냐?”
“그뿐인가?
회개와 선행은 꼭 필요한 것으로써
사람이 만약 고의로 이것들을 등한시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성결함을 받으리라고는,
곧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리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냐?”
“아니, 이것들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은혜 가운데서,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지식 가운데서
어떻게 성장할 수가 있겠느냐?”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지속할 수 있겠느냐?
그가 이미 받은 신앙에서,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계속 있을 수 있겠느냐?”
“너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계속 주장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이 성결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리라고 지지합니다.
칭의 전에 회개가 있는 것과 같이,
칭의 후에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칭의를 얻은 사람은 모두
선행에 열심이어야 할 의무가 있음도 인정합니다.
이것들은 꼭 필요하므로
만약에 이를 서슴지 않고 등한시하면
그가 성결함을 받으리라고는
이치로 보아서 기대할 수 없으며,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에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는 그가 이미 받은 은혜를 지속할 수도 없으며
신앙 안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 올바르게 이해된 이 회개와
모든 선한 일의 실천 곧 자비의 행위나 경건한 행위들이
(이것이 신앙에서 나온 까닭에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나 모두
성결하게 되는 데 필요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3) 믿는 자의 회개
1) 마음속의 죄
나는 여기서
‘바르게 이해된 회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회개를 전에 말한 회개와
혼동하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이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며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죄는
‘프로네마 사르코스’(φρόνημα σαρκός),
곧, 육에 속한 마음이며
우리 교회가 말하는 대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비록 우세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악에로의 성벽,
타락하기 쉬운 마음,
아직 머물러 있어 성령에 거슬리는 육의 경향성 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이것은 때때로
자만이나 고집, 분노로 발정하며,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곧 세상을 더 사랑하고,
안락을 더 사랑하고.
명예나 향락을 더 사랑하는 것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우리 마음속에 고집, 무신사상, 우상숭배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런 죄들에 의해서
우리는 천 가지 방법,
천 가지 모양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2) 행함 속에 있는 죄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를 깨달음과 함께
우리의 생활에 남아 있는 죄,
곧,
우리의 말과 행위에 아직도 고착되어 있는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병행합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최상의 것이라 할지라도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또는 방법에 있어서 악이 혼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한 것을 낱낱이 지적하신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아무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별로 생각하지 않던 것에서
자만이라든가
고집,
불신앙,
우상숭배 등의 오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에 우리가 흉악한 죄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던 것 이상으로
지금 우리의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일이라는 것은
그 안에 공적이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 때
감히 자랑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언약의 보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없노라고
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전적 무능
체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우리의 말과 행위에 고착된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만약 대속의 피로 계속하여 뿌림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자신 때문에 죄책을 스스로 져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회개에는 또 하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곧
우리의 힘으로 어떤 착한 생각을 하거나
좋은 소원을 가진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올바른 말을 한다거나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전능하신 은혜가 먼저 우리들에 앞서서 역사하시고
매순간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화에 필요한 선행
그러면 성결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선행(善行)은 무엇입니까?
1) 경건의 행위
첫째로,
같이 모여서 드리는 기도,
가족기도,
혼자 밀실에서 드리는 기도,
성만찬을 받는 것,
성경을 들으며 읽으며 명상하면서 탐구하는 것,
우리의 육신의 건강이 하락하는 범위 내에서
금식이나 일정 음식을 삼가는 것과 같은
모든 경건의 행위들인 것입니다.
2) 자비의 행위
둘째로,
모든 자비의 행위들입니다.
이는
사람의 몸에 관련된 것이든
영혼에 관련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배고픈 자를 먹이기,
헐벗은 자를 입히기,
낯 설은 자를 재우기,
감옥에 있는 자들을 방문하기,
병든 자들을 방문하기,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들을 방문하기,
그리고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기,
어리석은 죄인을 깨우기,
미지근한 자들을 분발시키기,
동요하는 자들을 굳세게 하기,
의지가 박약한 자들을 위로하기,
유혹 받는 자들을 구조하기,
또는 영혼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헌하기,
이것이 완전한 성화를 위해 필수적인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완전한 성화를 기다리기 위해서 가도록
지정하신 길입니다.
3) 조건적 필요
여기에 극단적으로 해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습니다.
즉,
이 해로운 의견이라는 것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나 실상은 해로운 것
곧
“신자에게는 죄가 없다”는 의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의롭다함을 입는 그 순간에
모든 죄는 그 뿌리와 가지가 모두
멸절되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는
회개를 전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결국은 성결에로의 길을
아주 차단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에나 생활에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회개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온전해질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사랑에 이르는 데는 회개,
곧 깨달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한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무 위험도 없으리라는 견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사 잘못 알아서 그런 은혜가
결코 얻어지지 않았고,
얻어질 수 없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래도 우리는 손해 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이렇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활기를 주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발전시켜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은 우리가 주신 달란트를 그가 남긴 것과 함께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온전한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인정하지만,
이것들이
믿음과 같은 정도나,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결코 동등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매들은 필요하지만
조건부로 필요한 까닭입니다.
즉,
그런 시간과 기회에 따라 필요한 것이기에
그런 열매 없이도 성결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성결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하고,
또 많은 선행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결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곧
그가 믿기 전에는 성결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순간에는
이런 회개와 열매를 많이 가지고 믿었든
적게 가지고 믿었든,
심지어 열매가 없다고 해도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회개와 열매는 부차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결함을 받는 데도
믿음이 즉각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만이 성결함을 받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며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완전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성결함을 받고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아
사랑 안에서 온전하여진다 할 때
그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약속
첫째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성경에 약속하셨다는 것에 대한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충분히 알기까지는
일보의 전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옛 약속을 보아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으리만큼 분명합니다.
즉,
약속하시기를
“내가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케하리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명백하게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또 얼마나 강하게
모든 죄에서 구원 받은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사랑이
온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한,
죄가 깃들일 틈이 그 안에 있겠습니까?
(2) 약속하신 것을 행하는 능력
둘째로,
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그가 이루실 수 있다고 하는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는
불결한 데서 깨끗한 것을 나타내며.
마음을모든 죄에서 정결케 하고
거룩한 것으로 채운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는 것을 알므로 이런 경우 아무런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런 일이
전능자의 힘이 아니고
그 밖의 다른 힘으로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아직까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3) 지금 행하심
셋째로,
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실 수 있으며
또한 지금 이를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데 대한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 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는 한 순간이 천년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룩하시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한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그가 존귀케 하시려는 사람에게
그 이상의 가치라든가 적합성을 원하시거나,
기다리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어느 시점에든지,
“보라 지금은 구원의날 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
“보라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
(히 4:7, 시 95:11, 막 22:4)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완전케 하심
이 확신,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결케 하여 주실 수 있고
또 지금 우리를 성결케 하려고 하신다는 확신 외에
또 하나 첨가되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신다는 신적인 증거와 확신입니다.
이것은 그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 때에
영혼은 모든 죄의 더러움에서 정결해집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여집니다.
그 때에 신자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엄숙한 말씀의 깊은 뜻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Ⅴ
결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큰 일을
우리의 영혼 속에서 점차적으로 하십니까?,
아니면 순간적으로 하십니까?
아마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저들이 죄가 끊어지는
그런 특수한 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뜻일진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곧
주님께서 그의 입김으로
눈 깜짝하는 순간에 죄를 멸하신다는 것이
훨씬 더 바랄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일반 적으로 그렇게 행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로서
이에 대하여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납득될 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매순간 이것을 찾으십시오!
위에서 설명한 방법에서 그 증거를 찾으십시오!
즉,
그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으니
모든 선행 안에서 증거를 찾으십시오.
설사 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여도
더 악화될 위험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바라는 일에서 실망을 당한다 하여도
손해 보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실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고 올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매시 매순간 그것을 구하십시오!
어찌하여 이 시간 이 순간에 찾지 않으십니까?
분명히 여러분이 신앙으로 그렇다고 믿을진대,
지금 이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증거에 의하여 여러분은 과연
이를 믿음으로 구하고 있는지,
선행으로 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선행에 의하여
무엇인가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결함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먼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또는
‘이렇게 행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오늘까지 이것을
선행으로 얻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으로 이것을 찾는다면,
당신의 현재 그대로의 상태에서(as you are)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현 상태로 가능하다면
지금 곧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다음 세 가지 점에
불가분리의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즉,
이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이들 중 하나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이들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인정하는 것은
곧 전부를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원칙에 진실하십시오!
그리고 이 축복을 구하십시오!
구하시되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just you are),
곧 더 나은 상태나 더 악화된 상태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가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지불할 것 없는,
또한 간구할 것도 없는,
다만 가엾은 죄인의 자리에서 구하십시오.
당신이 있는 그대로에서 이것을 구하신다면,
지금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지연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어찌하여 지연시키려고 하십니까?
그리스도는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당신의 원하는 바의 전부이십니다.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문 앞에서 계십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부르짖으십시오.
그대, 하늘의 손님이시여! 들어오시오, 들어오시오.
그리고는 다시 떠나지 마시고 저와 더불어 먹으며
이 잔치가 영원한 사람의 잔치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