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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찰스피니

본문

찰스 피니의 <Crystal Christianity>




 

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린도후서 7 : 10 ~ 11)

 


참된 회심이란 죄의 본질에 대한 견해(생각)가 변화하는 것이요, 이에 따라 죄에 대한 느낌도 달라지는 것이다. 느낌은 생각의 결과이다. 죄에 대한 생각의 변화와 함께 정서적 변화가 생길 때, 이 생각이 온당하고 여기에 합당한 정서적 반응이 뒤따르면, 이는 참된 회개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근심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에서 나오는 근심이다.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비치는 죄의 모습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비치는 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죄의 모습이 바람직하거나 매혹적이기는커녕 가증하고 혐오스럽게 비친다. 참된 회개를 한 자는 자신도 만약 회개하지 않았으면 그런 죄악된 짓을 너무나 원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놀란다. 완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들을 징계할 것이기 때문에 죄가 자신들을 파멸시키리라는 사실을 안다. 죄인들은 죄를 사랑한다. 죄를 짓고도 끝까지 행복할 수 있다면 죄인들은 절대 자신들의 죄를 버리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전적으로 가증하다고 인식한다. 뒤돌아보며 이렇게 외친다.

“내가 지은 이 죄란 얼마나 혐오스럽고 지옥에 갈 짓인가.”

죄인들은 하나님이 죄에 대해 무서운 징벌을 가하는 이유를 모른다. 죄인들은 죄를 너무나 사랑하여 왜 죄가 영원한 심판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하나님이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자기 양심상 자기의 죄를 강하게 알게 될 때 죄인들도 일반 기독교인과 동일한 시각에서 죄를 보게 된다. 그런 다음에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이에 상응한 정서적 변화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많은 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영원한 사망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안다. 알면서도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지옥의 마귀와 악한 영들에 해당한다. 참된 회개에는 견해의 변화가 필수적이며, 항상 그런 변화가 먼저 있어야 참된 회개가 온다. 회개 없는 견해의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견해의 변화 없는 참된 회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죄가 영원한 사망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이 완전히 변해 죄가 자신과 모든 사람을 해치고 있으며 이를 치유하려면 전반적인 죄의 포기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귀조차도 이것이 진실임을 안다.

회개하려면 죄의 결과 엄청난 징벌이 따른다고 인식하고 죄의 결과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바꾸어야 한다. 무신경한 죄인은 죄에 대한 정당한 징벌이 어떤 것인지 온전히 생각할 줄 모른다. 이론상으론 죄는 영원한 사망에 해당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사실을 믿지는 않는다. 이 사실을 믿었다면 그토록 무신경한 죄인으로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죄인이 죄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를 자신도 정직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진정으로 각성하여 죄를 확인한 죄인은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안다.



정서적 변화


참된 회개에는 감정의 변화를 수반한다. 정서적 변화가 생기면서 죄의 본질과 기능과 죄가 유도하는 것과 그 결과를 주시하게 된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죄를 혐오스럽고 사악하고 끔찍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 가슴으로도 죄를 미워한다. 죄란 해로운 것이며 가증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죄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참된 회심자는 전심으로 죄를 혐오하고 비난한다.

죄에 대한 이런 혐오의 정서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죄의 본질적 측면을 보게 되면 때론 슬픔의 눈물을 뿌리게 된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죄를 직시할 때 울고싶은 심정이 된다. 슬픔과 근심의 샘물이 샘솟아 나고, 얼굴을 땅에 박고 자기 죄 문제를 놓고 눈물을 펑펑 쏟는다.

죄의 결과가 어떤가를 알 때 믿음의 사람은 죄를 그만두고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불타는 욕구를 갖게 된다. 그의 가슴은 불 위에 올려있는 듯 뜨겁고 모든 힘을 다해 죄인들을 지옥에서 건져내고 이들을 끔찍한 죄의 결과에서 구원해 내고자 기도한다. 이는 마치 독약을 삼키려는 사람을 보았을 때와 같다. 그런 사람을 보았다면 목소리를 높여

“조심해!”

라고 소리칠 것이다.

믿는 자는 죄가 영원한 벌을 받을 일이며 하나님이 그런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준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확신한다. 믿는 자는 죄인을 지옥에 보내는 것을 지나치다거나 온유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지옥에 보내지지 않는다는 점을 너무나 경이롭게 여긴다. 자기 같은 죄인이 구원된다고 생각할 때 믿음 자의 감정은 전에 알지 못했던 감사함을 느낀다.

만약 당신의 회개가 진정이라면 당신은 죄와 관련해 당신의 견해와 감정의 의식적 변화를 겪었다. 당신은 이 점을 말할 수 있는가? 당신 안에 변화가 생겨 옛 것은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된 것을 아는가?

회개가 진정일 때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경향이 사라진다. 참으로 회개를 했다면 당신은 이제 죄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제 당신이 죄에서 멀리 떠나는 이유는 두려움이나 죄에 따른 징벌 때문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습관적으로 지었던 죄를 돌아 보라. 지금 그 죄의 모습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유쾌한 일인가, 감히 그 짓을 다시 실행하고 싶은가? 당신의 기질이 죄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면 당신은 죄를 확실히 깨달았다. 죄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변했는데 죄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다면 당신은 아직 완악한 죄인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회개를 이룬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행동양식을 바꾼다. 행동양식을 바꾸지 못한다면 회개가 회개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낳고 구원에 이르는 마음의 변화여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버렸는가? 아니면 여전히 죄악을 자행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죄인이다. 당신은 당신 마음을 변화시키고도 행위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룩한 회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회개가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


참된 회개는 죄를 고백하고 배상하게 된다. 훔친 돈을 갖고 있는 동안 도둑은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는 죄를 자각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가서 훔친 돈을 되돌려 줄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고 빼앗은 것을 원상태로 복원하지 않았다면, 또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고 그 상처를 고쳐주지 않았다면 그런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진정한 회개는 당신의 성품과 행위에 일어난 항구적인 변화이다. 이를 성경 본문에서는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라 이른다. 진정한 회개는 너무나 심오하고 근본적이어서 사람이 이를 되돌릴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위 성경구절을 “후회할 필요가 없는 회개”인 것처럼 해석하려 하는데, 본문 말씀은 “후회할 것 없는”이다. 이 회개는 너무나 철저한 것이기 때문에 되돌아가는 것이 없다. 죄에 대한 조금의 애착도 완전히 다 버렸다. 진실로 회개한 자는 누구나 죄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감정을 변화시켰고, 다시 죄에 대한 애착으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참회한 죄인은 확고한 회개의 감정, 절대 되돌아가지 않을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 회개가 정말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진짜 이유는 이 회개가 후회할 것 없는 회개이기 때문이다.

거짓된 회개는 이 세상 사람들의 근심이다. 이생의 삶과 관계된 세속적인 고려와 동기에서 생기는 죄에 동조하는 그런 근심이다. 대부분의 거짓된 회개는 다음 세상에서 누리게 될 자기 자신의 복락을 추구하는 동기에서 행한 회개요, 죄의 본질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거짓된 회개는 참된 회개처럼 견해의 변화에 토대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죄의 사악한 결과를 인식하고 이로 말미암아 심히 우려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죄가 자기의 성품에 크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자기 삶(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만약 자기의 비밀이 드러난다면 그런 불명예로 인해 두렵고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사람들 중에는 세속적인 고민 끝에 이런 류의 근심을 하기도 한다.

거짓 회개의 뿌리에는 이기심이 있다. 이런 회개는 자기 마음속에 느끼는 강한 후회심인지 모른다. 이 자는 자기 행위의 사악한 결과를 알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이 불행해지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점을 안다. 죄가 자기 가족과 친구나 자기 자신을 언젠가, 아니 영원히 해칠지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순전히 이기심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다. 깨무는 듯한, 삼키는 듯한 가책 - 그러나 이것도 진정한 회개는 아니다. 양심의 가책이 확대되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깊은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고 지옥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순전히 이기적이다. 죄에 대한 혐오심이 전혀 없으면서 또 저 무한한 죄악의 사악함을 가슴으로 분명히 느끼지 않으면서 말이다.

참된 회개를 행한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죄인이었고 이를 회개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거짓으로 회개를 한 자는 자신의 죄악들을 숨기기 위해 변명과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의 회개를 부끄러워한다. 아마 수천 가지 변명으로 자신의 죄악들을 위장하여 죄악들을 무마하거나 그 극악무도함을 약간이나마 감해보려 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말하더라도 항상 가장 부드럽고 가장 호의적인 말로 표현한다.



사망에 이르는 회개


거짓된 회개는 사망에 이른다. 거짓된 회개는 하나의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만든다. 이것은 열린 마음으로 겸손과 진실로 나아가지 않고 전혀 고백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인 반쯤만의 고백이다.

당신은 자신의 죄악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부끄러워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근심은 오직 세상적 근심일 뿐이다. 죄인들은 종종 자신의 죄악들에 대해 대화하기를 꺼리지만 스스로 열심히 근심하며 진리를 찾는 자라 칭하며 기독교인이 될 것처럼 예상한다. 이런 근심은 지옥에서 찾을 수 있다. 지옥에 거주하는 황폐한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천국에 속한 성도들에겐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는 것 같은 근심걱정은 없다.

공개적이고 진정한 근심은 참된 행복과도 일치한다. 성도들은 행복하다. 그러나 죄에 대한 깊고 가식없는 가책이 있다. 반면 세상적인 근심은 그런(성도의) 근심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고 비열하며 참담한 근심이다. 그 끝은 사망이다.

세상적 근심으로 드러난 변화는 단지 외적으로 확실한 것에만 국한된다. 그 내적 마음의 변화는 없다. 이런 사람은 남들로부터 잘못된 짓이라고 말들을 들은 분명한 죄악들만을 피하려 한다.

여기 한 젊은 회심자가 있다. 이 젊은이가 미혹된다면 그의 행동에 부분적 변화밖에 없는 줄 알라. 즉 일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계속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젊은이는 몇몇 사항에 대해선 매우 엄격하고 재빠르지만 전반적인 죄와 관련한 기독교적 정신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회개로 일어난 변화는 변화된 부분에서조차 일시적이다. 이런 사람은 계속 옛 죄로 되돌아간다. 죄에 기울어진 기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두려움 때문에 억눌리고 규제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자가 소망을 갖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격려를 받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도 곧 자기의 옛 죄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집이 겪은 곤란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비롯한 여러 죄악 속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들에겐 세상적 근심만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 만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교인의 대열에 들어간 다음에 다시 옛 죄악으로 돌아간다. 이를 “냉랭해지는 것”또는 “되돌아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이들은 항상 죄를 사랑했다.’

이 죄에 대한 사랑이 모든 육신들의 기초이며 종교적으로 이런 성향이 많은 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각성되고 자기 죄를 확인하지만 곧 전혀 안전하지 못한 것에 거하여 실족한다. 어쩌면 자기를 지키고 교회 밖으로 나가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죄의 근본이 깨어지지 않는다면 언제고 다시 자기의 옛 방식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진정한 회심자에게는 회심 전에 가장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던 죄에서 가장 멀어져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죄를 가장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 죄에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가장 적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미혹되어 세상적인 마음에 사로잡히면 항상 똑같은 죄악으로 나아가게 된다. 죄의 근원이 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기의 불법을 마음으로부터 정화하지 않았고 항시 마음 속에 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속박과 율법주의


거짓된 회개로 인한 변화는 부분적이고 일회적일 뿐만 아니라 강제적이고 구속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진정한 회심을 한 자의 개혁은 마음으로부터 온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경의 약속이 실현되었다. 그는 지혜의 길을 찾았으니, 잠언에 이르되,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 3 : 17). 그는 또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이 가볍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또 하나님의 계명은 가혹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는 것을 느낀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 : 10)

그러나 가짜 회개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공포 때문에 하게 된 율법적 회개다. 이기적인 회개는 자발적으로 죄에서 순종으로 태도를 변화시킨 것이 전혀 아니다. 당신도 바로 이런 식의 회개를 하게 되면 당신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죄에서 벗어나려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죄에 대한 혐오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양심상의 제약 또는 자기의 영혼과 소망과 자기 인격을 상실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동기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자들은 항상 자기 죄에 대해 변명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고, 자신들처럼 행동하는데 무슨 해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사랑한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이 없다면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범죄 속에 있을 것이다.

참된 회개는 이와는 판이하다. 어떤 일이 위대한 사랑의 법에 어긋난다면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그 일을 미워하고 그 일을 피하려 한다. 사랑의 법에 위배되는 일이면 곧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것이요, 도둑질이나 기타 혐오스러운 일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참된 회심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자기 주변 사람을 짓누를 필요는 없다.

거짓된 회개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로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알고 구원을 위해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한다고 공언하면서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보다 자기 자신이 이룬 혁신을 열 배나 더 의지하는 자가 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말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기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의를 쌓고 있다.

이런 자는 자신의 세속적 근심을 진정한 회개라고 생각하고 안심한다. 이 자는 자기 죄 때문에 자신이 근심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안식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한다. 이 자는 근심했는데, 그것으로 안심했고 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느낀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전혀 예수님을 의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류의 근심을 하는 자는 이런 근심을 하는 횟수에 비례하여 그만큼 더 마음이 강팍해진다. 자기 죄에 대해 강한 확신이 드는데도 자기 마음이 깨어지지 않는다면 그 감정의 샘은 말랐고, 그의 마음은 더 강팍해진다.

진정으로 회개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진리를 접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 말씀 아래서 더욱 더 쉽게 진리의 영향을 받고, 자극되고, 그 마음이 깨어진다. 그의 마음은 자기가 이해하고 깨달은 진리와 동행할 태세를 갖추고, 이런 그는 어린아이처럼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강팍한 마음


교회든 교회 내 개교인이든 단지 세상적 회개만하면 처음엔 부흥되고 각성되지만 그 다음엔 다시 냉냉해진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다시 각성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곧 맷돌처럼 마음이 굳어져 그 무엇으로도 다시 부흥케 할 수 없다.

물론 참된 회심을 경험하는 교회와 개인들도 몇몇은 있다. 이들은 연속적인 부흥의 단계를 거쳐 점점 더 부드러워진다. 이들은 부흥의 나팔소리를 들을 때 즉시 달아오르고 부흥의 역사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다.

참된 회심과 거짓된 회심간의 간격은 빛과 어둠 사이만큼이나 넓다. 죄인들은 반복된 부흥을 겪은 후에 그 부흥을 조롱하고 비판한다. 하늘에 자비의 구름이 자기 머리 위에 있어도 이들은 그 자비를 거절한다. 이들이 참된 회개를 하지 않으면 새로운 흥분이 있을 때마다 그 마음은 더 강팍해지고 진리에 도달하기 더 어려워진다.

진리의 빛이 마음 속에 섬광을 터뜨릴 때마다 고통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참된 기독교인이 지닌 그런 확신이 없다. 반면 진정한 기독교인은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 때문에 눈물이 넘쳐날 때 그 마음에 평안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믿음의 확신에 서서 더욱 경계하고 부드럽고 신중해진다. 자기 양심이 아주 민감해져 약간의 악이라도 나타나 자신을 해할까 조심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종류의 근심, 곧 진정으로 죄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는 근심은 그 마음을 더욱 강팍하게 만들고 곧 뜨거운 철판처럼 양심에 화인맞게 한다.

거짓된 회개는 분명 후회되는 회개다. 거짓된 회개를 하는 자들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느낌을 부끄러워한다. 이들은 자기 내면의 감정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말하더라도 항상 경박하고 냉담하게 말한다. 이들은 아마 부흥의 시기에 호들갑을 떨고 다른 사람들처럼 무척이나 바쁘게 돌아다닌다. 이들은 어떤 일에서든 극단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부흥이 지나고, 부흥으로 생긴 새로운 방식들에 반발하며 다시 옛날처럼 변하고 부흥기 때 보인 자기 열정을 부끄러워한다.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회개를 회개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에 참석한 후 자신들의 공개적 회개를 부끄러워 할 것이다. 부흥의 절정이 지나면 “지나치게 열광적”이라고 말하면서 좀더 냉정하고 일관될 필요가 있다고 말할 작자들이다.

때때로 어느 부흥기 때 회심했다고 고백한 자들이 자기 회심을 가능케했던 방법과 교리와 그 감격을 반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실한 기독교인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회개를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흥 때 자신이 느낀 흥분에 대해선 추호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다. 세상적인 근심을 “후회하지 않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착각한다. 이것이 여러 해 동안 관찰해 본 결과 전 세계적으로 교회의 상태가 이런 개탄스러운 상태에 있는 진실된 이유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현실


많은 죄인들은 속된 세상 친구들과 죄악들을 버리는 일이 무척이나 큰 시련이라고 여긴다. 이들은 진실한 회개를 한다면 자신들의 죄악을 포기하는 것을 어떤 십자가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교회에 참석하는 걸 처음 보았을 때 이들 영혼이 구원되어 천국에 이를 것이니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회개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젊은이들이 진실로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교회에서 행복할 수 없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들은 진정한 회개가 자신들이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을 혐오하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젊은 친구들이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될 때 죄악된 쾌락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점을 모른다.

거짓된 회개를 경험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향유하는 것(기쁘게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들은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이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던 그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또 교회에 헌금을 해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심히 걱정한다. 이들은 항상 지옥 불 속에 있다. 자기부인을 할 때마다 누리는 기쁨과 진리 안에서 누리는 기쁨 대신 이들은 그 단순명료한 진리에 고통받는다. 왜 그런가?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다하고 싶어한다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마음속에 환대하고 이로 인해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듣고 혹 모든 기독교인들은 완벽하다고 내가 주장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세상으로 돌아간 위선자와 일시적으로 타락한 기독교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위선자들(외식하는 자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돌아갈 때 죄를 즐기는 자다. 그에게도 두려움과 가책과 자기 인격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는 죄를 즐긴다.

일시적으로 타락한 기독교인은 이와 다르다. 그는 첫사랑을 잃고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진 자다. 그러나 그는 죄를 사랑하지 않는다. 죄는 항상 그를 아프게 한다. 그는 불행하고 영적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 시간 그를 죄로부터 막아줄 하나님의 영이 없지만 죄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불행하고 곤고한 자와 같은 심정이 된다. 그는 위선자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는 절대로 다시 죄를 즐기거나 세상적 쾌락에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로 불법을 물같이 마실 수 없다. 그가 계속 방황하는 한 그는 불행하다.

확실한 죄인들은 자기 죄악들을 버리겠다고 다짐하기를 두려워한다. 이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을 겁내기 때문에 약속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죄를 사랑한다. 술주정꾼은 자기가 독주를 좋아한다는 점을 안다. 술을 적대시할지는 몰라도 여전히 술을 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죄인들은 죄를 사랑한다. 그리고 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 죄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려 하지도 않는다.

세상적 근심을 하는 죄인들은 어디에 문제가 있고 왜 자기가 회심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죄에 대한 이들의 지적 판단은 자기 마음이 합하면 그것으로 자기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정도가 진정한 회개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이 진심으로 모든 죄를 흔쾌히 포기하려고 하면 죄를 포기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실제로 버렸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반대로 자기 죄의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죄를 사랑하면 죄를 버려야겠다는 당신의 결심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더더욱 깊이 지옥에 빠지게 된다.

다음 성경 구절대로 기도합시다. 이 말씀이 우리의 회개가 진정이라는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린도 후서 7 : 11)




제 3 장 : 진정한 회심과 거짓된 회심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 이사야 50 : 11 -


분명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공언하고 또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소망은 (헛된 불이니) 제 손으로 만든 불꽃으로 자기 임의대로 불붙인 불이다. 이런 이야기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이 이야기를 적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면 별로 유용하지 않다.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적용할 의도가 있다면 당신의 진실한 상태를 확인시켜줄 수 있겠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미혹된 상태라면 구원의 참된 길로 인도하겠다.

회심하기 전 인간의 자연적 상태는 순전히 이기적이다. 이들에겐 복음의 자비가 없다. 이기심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행복을 최고로 여기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하나남의 영광과 보편적 선과 같은 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는 다른 관심사들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무엇보다 우선한다. 회심하기 전의 인간은 여러 가지로 살펴봐도 다 이런 상태에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인류의 모든 거래는 바로 이 원칙에서 이루어진다. 이 원칙을 간과하고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거래를 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는다.

자비란 타인의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다. 회심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은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싶어진다. 회심한 사람은 자비로우며 지극히 비이기적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다. 자비는 하나님의 총체적 성격이다. 하나님의 모든 도덕저 속성은 하나님이 지닌 자비의 표현이다. 회심한 자는 이런 면에서 하나님과 닮는다. 완벽하게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자비롭지 않으면 회심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마음의 지배적인 자세는 주로 자비로운 것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타인에게 좋은 것만을 진지하게 추구한다. 자비에 무신경하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증진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순전히 자비롭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자기 피조물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의 행복을 사랑하고 피조물 자신들을 위해 그들의 행복을 선택한다. 물론 자기 피조물의 행복이 증진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충족을 추구하려고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자비로움은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법은 이렇게 요구한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 : 37, 39) 회심한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닮은 만큼 하나님의 법에 복종한다. 그는 자비로운 것이다. 이것이 회심한 자의 마음의 가장 주도적인 특징이다.

참된 회심은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 상태에서 자비로운 마음으로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목적 자체의 변화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순히 방법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회심한 자와 회심하지 않은 자의 목적은 동일한데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가브리엘과 사탄 모두 are not both aiming to be happy. 천사장 가브리엘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동기와 행위


어떤 사람은 자기 수단을 변경시켜도 자기 자신의 행복이라는 목적은 동일하게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이 자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영원함도 믿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이익이 되리라고 판단할 수는 있다. 만약 그의 눈이 열려 영원함의 실재를 본다면 이 자는 종교를 영원한 행복의 방편으로 취할지 모른다. 여기에는 어떤 덕성도 없다. 어떤 행동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이용된 수단이 아니라 그 행동의 동기이다. 이런 면에서 참된 회심자와 거짓된 회심자는 차이가 난다. 참된 회심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선을 선택한다. 참된 회심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선함을 훨씬 더 나은 것으로 여긴다. 자기 자신의 행복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더 우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보다 큰 선이기 때문이다. 평가할 능력만 있다면 진짜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각 개인의 행복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최고의 선을 자기의 최고 목적으로 선택한다.

참된 성도와 미혹된 사람이 일치하는 것도 있고 서로 다른 것도 있다. 도덕적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서로 같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는 다르다. 참된 성도는 거룩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도덕적 삶을 산다. 미혹된 자는 도덕성을 자신의 행복 증진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성도나 미혹된 자나 모두 기도의 형식에서는 똑같이 기도에 충실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는 다르다. 참된 성도는 기도를 좋아하지만 성도가 아닌 자는 기로로 뭔가 유익을 얻으려는 희망에서 기도한다. 참된 성도는 기도로부터 유익을 소망하지만 그 유익이 기도를 하게 된 주된 동기는 아니다. 성도가 아닌 자의 기도에는 유익 외의 다른 동기가 없다.

성도나 미혹된 자나 모두 종교적 열심에서는 동일할 수 있다. 참된 지식에 따라 종교적 열심인 사람은 진리를 위해 기독교적 정신을 증진하려 진지하게 갈망하고 원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또는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까 두려워 종교적 열심인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양심을 평안하게 하기를 원하고 기독교 자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참된 성도나 미혹된 자 모두 자기의 의무에 책임을 다할지 모른다. 참된 성도는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미혹된 자는 감히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둘 다 의로운 것을 존중할 수 있다. 참된 회심자는 의로운 것을 사랑하고 거짓된 회심자는 자신이 의롭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짓된 회심자는 사업상 계약에 정직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직하다는 평판을 얻는다. 그러나 이 이상의 고결한 동기를 지니지 못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일한 갈망을 갖고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마음이 같을지도 모른다. 참된 회심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미혹된 자는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마치 고용된 종이 자기 주인에게 하듯이 말이다.

참된 성도는 심령들의 회심을 갈망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미혹된 자는 사적 이득을 얻으려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한다. 이는 기부금을 내는 데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기적인 동기만으로 성경 공부 모임이나 선교단체에 돈을 기부할 수도 있다.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심령들의 회심을 바라기도 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



거룩함과 이기심


참된 회심자와 거짓된 회심자 모두 회개하기를 갈망한다고 하겠다. 참된 회심자는 죄를 혐오한다. 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된 회심자는 자신이 회심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회개하기를 갈망한다.

참된 성도는 거룩함을 고양하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거짓된 회심자는 순종에 따른 보상을 바란다.

이들은 갈망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단호한 결심에서도 서로 일치할 수도 있다. 둘 다 단호하게 죄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이들 둘 모두 강력한 목적의식을 갖고 결심하지만 그 동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들이 세우는 계획도 유사할 수 있다. 둘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거룩함으로 일하고 거짓된 회심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 즉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일 자체가 목적이지만 다른 사람은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증진하는 수단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택한다.

둘 다 진정으로 거룩하고자 하는 계획을 품을 수 있다. 참된 성도는 거룩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룩하고, 미혹된 자는 다른 방법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룩하려 한다.

둘 다 성경말씀을 사랑할 수 있다. 참된 성도는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안에서 기뻐한다. 미혹된 자는 성경말씀을 읽고 자기의 이기적 소망들에 적용한다.

참된 성도는 지극히 사랑스럽고 그 자체로 뛰어난 하나님의 성품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미혹된 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특별한 친구요 자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의 이익과 연계되어 있다.

둘 다 그리스도인을 사랑할 수 있다. 참된 회심자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미혹된 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교파 사람이기 때문에 또 자기 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한다.

둘 다 싫어하는 것이 동일할 수 있다. 즉 둘 다 부정을 싫어하고 이에 강력히 반대할 수 있다. 참된 성도는 부정이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적이기 때문에 싫어하고 미혹된 자는 그것이 자기 이익을 해치기 때문에 싫어한다.

참된 회심자는 죄를 미워한다. 죄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혹된 자도 죄를 싫어한다. 죄가 자기 자신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죄악들을 혐오하지만 그 죄악들을 버리지 못한다. 술주정꾼은 종종 자신이 술취했던 때를 돌이켜보고 술이 자신을 파멸시키기 때문에 혐오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술을 마신다. 술의 여파를 생각하면 분노심을 느끼면서 말이다.



성도들의 사랑과 죄인들의 사랑


참된 성도는 죄인들을 부드럽게 반대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복하려는 어떤 행동이나 특성도 혐오한다. 거짓 회심자도 죄인들을 반대하지만 그것은 죄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참된 회심자나 거짓 회심자 모두 심령들의 회심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참된 회심자는 진심으로 회심을 원하고 회심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미혹된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앞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심을 사랑한다.

참된 회심자나 거짓 회심자 모두 교회에 열정이 없다고 안타까워할 수 있다. 참된 회심자는 하나님이 영예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미혹된 자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슬퍼한다.

참된 회심자는 영적 대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미혹된 자는 성도들의 교제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점들을 없애려고 한다. 참된 회심자는 마음의 풍성함에서 입으로 우러나는 대화이기 때문에 성도간의 영적 교제를 즐겨한다. 미혹된 자는 종교적으로 느끼는 큰 이득과 천국에 가게 된다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참된 성도는 예배와 기도와 하나님 말씀 듣기를 좋아한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성도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한다. 미혹된 자는 종교적 모임이 자신의 특별한 소망을 지탱해준다고 생각한다. 이 자는 종교적 모임을 좋아할 이유가 수없이 많지만 예배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둘 다 기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서 기쁨을 찾는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미혹된 자는 은밀히 기도하는 것이 의무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의의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에서 만족감을 찾는다. 이 자도 기도를 하면서 어떤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자기 마음의 흥분 상태로 이것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착각하는 것이다.

참된 회심자나 거짓 회심자 모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할 수 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법이 뛰어난 것이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한다. 거짓 회심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하나님 법의 징계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하나님만이 자신을 지옥으로 보낸다고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 법의 징계에 동의한다. 미혹된 사람은 자신은 지옥에 갈 위험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미혹된 자는 하나님의 징계는 정당하고 자기 양심이 이를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징계에 대해 존경심을 느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징계에 해당된다고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데 다같이 후할지 모른다. 두 사람이 동일한 가치의 기부를 할 수 있지만 그 동기는 다르다. 한 사람은 아무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기부한다. 그러나 미혹된 자는 자기가 기부한다는 사실을 알리려 기부한다. 즉 자기 양심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은총을 돈으로 사려고 하기 때문에 기부한다.

이들 둘 다 많은 부문에서 동일하게 자기부정을 할 수 있다. 참된 성도만이 자기부정을 하는 건 아니다. 메카로 순례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희생적 모습을 보라. 맨 무릎으로 피가 날 때까지 날카로운 돌 위를 기어가는 천주교도들의 모습을 보라. 그러나 이런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참된 성도는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자기 자신의 방종과 이익을 위하기보다는 남을 위하는 것이다. 미혹된 자의 자기부정 역시 참된 성도의 자기부정 못지 않지만 그 동기는 순전히 이기적인 것이다.

참된 회심자와 거짓 회심자 모두 기꺼이 순교를 한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어 보라. 이들 중 일부는 분명 순교로 인한 보상을 바라고 이런 잘못된 생각에 기꺼이 순교를 하기도 했다. 이들은 순교가 영생에 이르는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려 한 것이다.

이상 언급한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이 두 부류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그 차이점은 서로 다른 목적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한 부류는 주된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택하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이익을 택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이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본다면 이는 부정한 죄인이 진짜 그리스도인처럼 이타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어떤 상태인가?


이 두 부류가 그토록 유사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알 수 있는가? 우리 가슴이 무엇보다 기만적이고 그리고 절망적일 만큼 사악하다는 점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자비와 거룩함을 찾는다면 그런 모습이 우리의 일상사에 나타나게 된다. 이기심이 하나님의 지배만큼이나 확실하게 우리 행동을 통제한다면 우리는 정녕 이기적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에게 이기적이라면 우린 하나님께도 이기적이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 : 20)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상사가 이기적이라면 우리는 회심하지 않았다. 이것이 옳은 소리가 아니라면 자비가 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

당신이 만일 무정한 자라면 그런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중요한 과업이 되지 않는다. 마치 자기의 일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하나님의 일에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된 회심자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면 수고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힘든 일에 불과하다. 만약 하나님 일에 즐겁게 임한다면 그것은 뭔가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재산의 증식이나 가족의 부양과 편안 등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일부 사람이 지닌 태도이다. 이들은 약을 먹는 병자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이 약의 효력이 있기를 갈망하면서 이 약을 반드시 먹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걸 안다. 이들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는 절대 행하지 않을 자다. 어린아이가 놀이를 좋아하듯 일을 좋아하는 어른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들은 그 일을 하는 것의 즐거움 외에 다른 어떤 동기가 없어도 하루 종일 그 일을 한다. 기독교 그 자체를 사랑할 때 거기엔 전혀 지겨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 전반에 걸쳐 냉랭한 시대라 할지라도 진정한 회심자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혹된(타락한) 자는 영원히 이 세상에 집착할 것이다. 참된 성도는 일어나 자기 기쁨을 외칠 것이고 그래서 기독교는 부흥되기 시작한다. 부흥이 시작되면 미혹된 자는 곧 참된 성도들보다 더 법석을 떨고 열심을 떤다. 이 자는 마치 감정이 아니라 확신에 따라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부흥의 대중적 관심이 없어지면 미혹된 자는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가 각성될 때 그는 자기 양심을 숨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이기심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이기적이라면 당신의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기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주로 천국에서 누릴 좋은 것들에 대한 소망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이런 당신의 기쁨은 기독교의 기쁨이 아니다. 이는 참된 성도의 기쁨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느낄 때 그때 자기 믿음을 즐기는 것이다. 즉 이 기쁨은 당신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소망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잃을 때 종교에 대한 기쁨이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기독교 그 자체를 사랑했다면 이들의 기쁨은 그런 소망에 의존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에 고용된 것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지옥에 보내 거기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한들 당신은 기뻐할 것이다.

물론 참된 성도도 자기의 소망에 즐거워한다. 하지만 그 소망에 대해선 아주 조금만 생각한다. 이와는 반대로 미혹된 자는 자신이 자기의 의무들을 즐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이 자는 열심히 일해 큰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자기 의무들을 기꺼이 행한다.

참된 성도는 천국이 이미 그의 심령에 시작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평안을 향유한다. 참된 성도는 천국에 대한 전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생이 실질적으로 그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이다.(히 11 : 1). 천국이 자기 안에서 시작되었고 영생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죽음을 기다릴 것까지 없음을 안다. 그의 즐거움은 자기 소망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룩함과 비례한다.



사랑의 순종


당신이 종교적으로 이기적인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이것이다. 즉 미혹된 자에겐 순종이 (도달해야 할) 목적이지만 참된 성도는 스스로 좋아서 순종에 따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법인데 두렵게도 이런 분별을 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순종을 목적으로 여기고 진정으로 선호하지는 않는다. 선호한다는 것 이것은 실질적 선택, 즉 마음으로부터 순종이다. 여러 사람들이 순종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하지만 이를 달성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 게 정말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참된 성도는 순종을 더 선호하고 선택한다. 순종하겠다는 목적은 사도 바울이 지닌 순종에의 목적의식과 같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 순종하겠다는 강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속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순종하지 못했다. (로마서 7장을 보라). 거짓된 회심자는 거룩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해지는 것을 알고 그 길만이 행복해지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참된 성도는 거룩함 자체를 위한 거룩함을 선택하고, 또 (실제로) 거룩하다.

참된 회심자와 미혹된 자는 그 신앙에서도 다르다. 참된 회심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확실히 믿는다.

인간적인 차원이든 거룩한 차원이든 어떤 통치에 대한 순종은 공포와 신뢰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생긴다. 가족을 다스리든, 배의 선원을 다스리든, 국가나 우주를 다스리든 모든 순종은 두려움에서 나오거나 아니면 신뢰 때문에 나온다.

보상을 바라거나 벌이 두려워 순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랑으로 일하는 정부의 모습을 신뢰하여 순종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는 신뢰로 부모님께 순종한다. 이 아이의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기대와 두려움 때문에 겉으로만 순종하는 자도 있다. 참된 회심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갖는다. 이것이 믿음의 순종이다.

한편 그저 부분적인 믿음과 부분적인 순종만하는 사람이 있다. 악마는 부분적 믿음을 지니고 있다. 악마도 믿고 떠는 것이다. (야고보 2 : 19참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구원받고자 예수님께 순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의 순종은 자신이 구원된다는 조건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은 절대 하나님의 전 인격적 성품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에 따른 순종이 아니다. 무조건적 신뢰를 할 때 “주님 뜻대로 이루소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오로지 구원에만 순종한다. 그의 종교는 율법의 종교다. 율법의 종교와 정반대는 복음적 신앙이다. 율법의 종교에 매인 자가 이기적이라면 복음의 신앙을 가진 자는 자비롭다. 이것이 이 두 부류를 구별짓는 진짜 차이점이다. 한 쪽은 외적이고 위선적인 반면 다른 한 쪽은 내면적이고 거룩하며 하나님이 받아줄 만한 자다.

당신이 이기적이라면 죄인들의 회심에 자기가 조금이라도 간여할 때만 그들의 회심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자기와 전혀 관계도 없는 사람의 문제라면 그가 회심을 한다고 조금도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기적인 자는 죄인들의 회심에 자신이 적극적이고 또 성공적일 때 기뻐한다. 왜냐하면 받을 보상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죄인을 회심시킬 때는 기뻐하기는커녕 시기한다.

참된 성도는 다른 사람의 힘으로 죄인들이 회심할 때 그것이 마치 자기가 한 일이라도 되듯이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관계할 때만 부흥에 관심이 있다. 이런 자는 죄인이 복음전도자나 다른 교파의 목사에 의해 구원받게 되기보다 회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자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백성의 참된 영은 이렇게 말한다. “주여, 당신이 뜻하는 자 누구든지 보내소서. 오직 영혼들을 구원하사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상대적 가치에 따라 자신의 행복을 생각해 보라.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의 영광과 우주적 선으로 간주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할 때 의미하는 바다.

당신은 사실 자신의 행복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양시키려 할 것이다. 당신의 행복은 주로 덕스러운 갈망들(virtuous desires)을 충족하는 데 있다.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데 즐거움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진짜 행복이 아니다. 덕스럽기 위해서는 자기의 욕망에는 무관심해야 한다.

춥고 배고프고 곧 죽게 된 거지를 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만났다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은 마음이 아파 가게에 들어가 빵 한 덩어리를 거지에게 사주지 않겠는가. 그 순간 거지의 얼굴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으로 빛날 것이다. 이런 행동을 할 때 그 남자가 느끼는 충족감은 자기 행동의 동기와 정확히 비례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면 이 사람이 느끼는 충족감이란 그 행동 자체로 충만하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남들에게 자신이 자비롭고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어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때까지 충족되지 않는다.

죄악에 빠진 한 죄인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매우 사악하고 황폐한 상태에 있다. 당신의 동정심이 발동해 이 죄인을 예수님께 인도한다. 이런 행동의 동기가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고 하나님의 은총을 획득하려는 것이라면 당신의 행복은 당신의 행동이 알려질 때까지는 온전히 달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순전히 한 심령을 사망에서 구원하려고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 자체로 당신이 느끼는 충족감은 충만하다.

선행 자체가 목적이라면 당신은 당신이 선행을 하는 만큼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자기 자신의 행복을 획득하기 위해 선행을 한다면 당신은 행복하기 어렵다. 당신은 자기 그림자를 좇는 어린아이와 같을 것이다. 그림자는 항상 그 아이 앞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절대 그 그림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거지를 구제할 생각은 없고 단지 남의 박수를 바랬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누군가 당신의 행위를 알고 칭찬해 줄 때까지 거지를 구제하는 데 즐거움을 못 느낄 것이다. 칭찬을 들은 다음에야 만족할 것이다. 그러니 그 일 자체에는 만족하지 못한다. 또 죄인을 회심시키려는 목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죄인을 회심시키려는 것이 죄인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어떻게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이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진리는 이렇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행복이 아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항상 자기 행복을 자기 앞에 둔다. 만약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중단하고 선을 행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다.



거룩함을 통한 행복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고 자기 앞에 놓은 기쁨을 생각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이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구원에 합당한 일을 이루러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완벽하게 행복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예수님의 목적이다. 타인의 행복이 예수님 앞에 놓인 기쁨이요, 이 기쁨을 예수님은 지녔다.

요한 1서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 : 19)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는 힘이 되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해석을 예수님이 아래의 산상수훈에서 전적으로 부인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 : 4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 성품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푼 은총 때문이라면 그런 우리를 예수님은 사악하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은 미덕(선행)의 결과로서 행복이지 자기 자신의 행복 추구가 미덕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선을 원한다면 이 바람을 충족하는 만큼 행복할 것이다.

하나님은 참된 회개를 요구한다. 즉 죄는 그 자체로 혐오스럽기 때문에 죄를 버리는 것이다. 용서해 준다는 조건으로 죄를 버리거나 “당신이 나를 용서해준다면 내 죄에 대해 유감이오.”라고 말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다. 참된 회개는 참된 믿음과 참된 순종을 요구한다. 조건적 믿음이나 부분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과 순종을 성경은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본질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이란 다른 사람을 돕고 부양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율법 아래에서보다 덜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 서면 시류를 따르는 것이요, 세상적이 된다. 그리고 복음은 자신들의 결점들을 보충하고 보완해주는 것이 된다. 반면 복음은 죄악을 파괴하고 거룩함을 증진하기 위한 거룩한 자비심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복음의 전반적 가치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에 있다.

이 논의에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성화와 하나님 백성들의 선한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보기보다 훨씬 더 죄인들의 회심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인들에게 대해 본능적으로 동정심을 갖고 죄인들이 지옥에서 구원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이 달성되면 이들은 더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죄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에 민감하다.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 범죄하는 것을 보고 더욱 더 심한 고통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더 불명예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인들 중에는 회심의 역사를 볼 수만 있으면 됐지 그 이상 교인들이 어떻게 사는지에는 관심이 없이 사람도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이 거룩함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죄인들에 대한 동정심이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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